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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서오릉(2)

 매표소에서 바로 입장하면, 작은 광장과 쉼터가 있고, 작은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수경원 이정표를 보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순행코스이다. 입구에서 얻은 안내서를 보며, 수경원-익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을 차례로 찾았다. 관람객들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한적한 오솔길을 걸었다. 맑은 하늘, 상쾌한 바람, 선선한 날씨 산책도, 명상도, 상상하기도 좋은 청명한 숲길을 내내 그렇게 걸었다.

 

 

1. 수경원 -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의 묘

 

서오릉에서 처음 만나는 능원이 수경원인데, 영조의 후궁이자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이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였다. 40이 넘어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는 원자의 탄생을 크게 기뻐했으나, 사도세자는 영조가 지지하는 노론보다는 소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영조를 비롯한 궐내의 모든 인물들과 사도세자는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10세에 혼인한 세자빈 홍씨는 노론집안의 출신이었고, 영조의 나이 60세 때 새로 간택한 정순왕후 김씨 역시 노론집안이였다. 친모인 영빈 이씨마저 자신의 친딸인 화완옹주와 함께 노론을 지지하여 아들 세자와의 거리를 더욱 요원하게 하였다. 사도세자는 당시 힘이 없었던 소론과 남인과 친하게 지냈고, 영조 몰래 소론과 남인이 주로 사는 관서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역사 문헌에 조울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했지만 결국 노론을 제지하려는 영조의 정치적 수단으로써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동이'에 나오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는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대단했었다고 전한다. 영조는 그가 미워하던 소론을 쫓는 사도세자를 단호하게 죽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로부터 사소한 일에도 꾸중을 자주 듣다 보니 조울증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궁인들과 내시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영조는 화가 나서 세자에게 자결을 하라 명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은 뒤주에 가두게 되었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죽고 말았다.

 아들의 비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빈 이씨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며, 1764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서대문 신촌에 장례하였다. 1968년 6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했는데, 봉분은 평민들의 묘와 다를 바 없이 매우 단출하고 간소하게 꾸몄다.

 

 

 

2. 익릉-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광산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서포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의 딸로 11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가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승격되었다. 슬하에 공주 둘을 두었으나, 모두 오래 살지 못했고, 왕후 역시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경왕후 승하 후, 계비가 인현왕후, 인원왕후이며, 이들 계비들은 같은 서오릉 경내인 명릉에 있다. 김만중은 인경왕후의 삼촌으로, 장희빈을 빗대어 '사씨남정기'까지 지었는데, 이는 서인계열이었던 그들이 인현왕후와 더불어 몰락하게 되자, 남인계열의 장희빈 세력을 축출하고 희빈 장씨를 모델로 소설까지 써서 그들의 정치적 회복을 도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희빈 장씨의 묘는 여기서 세 자리 건너 대빈묘에 있다.

서오릉은 숙종과 그의 여인들의 능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인경왕후의 능을 지나 한참을 걸어나오면,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정표를 보고 우회하면 바로 순창원이다.

 

 

3. 순창원 - 조선 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

 

 명종은 중종의 둘째 적자(嫡子)이자 인종의 아우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첨정하였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문정왕후 사후, 선정을 펼치려 노력하였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고, 제2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와는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坡平) 윤씨였지만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민감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리권자였던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에서는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고 칭했다.

 처음 인종이 세자로 책봉될 때 문정왕후는 표면적으로 이를 옹호하였으나 자신이 명종을 낳자 왕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은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언제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인 명종을 세자로 옹립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에는 김안로가 실각하고 문정왕후 세력인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위계승 문제는 일단락 되어 윤임이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윤임은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을 등용하여 그 기세를 회복하는 듯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세가 급반전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의 실권을 잡은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그의 조카이자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鳳城君)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소문을 내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 성종의 셋째 아들인 계성군(桂城君)의 양자(養子)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하고 이들의 일가는 물론 그들을 따르던 사림을 유배시키는 이른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1547년에는 ‘여주(女主)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으로 문정왕후의 권세를 비난하는 내용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발생하자 대윤의 나머지 무리들의 소행으로 몰아 이들을 모두 숙청하는 옥사가 일어나 윤원형의 권세는 더욱 강해졌다.

 이로써 외척이 전횡하게 되자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1559년에서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는 등 횡행하였고, 밖으로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오던 왜인이 1555년 배 60여 척으로 전라도에 침입하여 영암·장흥·진도 등을 유린하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하였다. 이들 왜인은 이준경·김경석·남치근 등에 의해 영암에서 격퇴되었고 이를 계기로 명종 9년(1554) 이전까지는 전시에만 설치되는 임시 관청이었던 비변사가 정규 관청이 되어 독자적인 합의기관으로 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 13세에 죽고, 왕위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선조이다. 능은 강릉(康陵)으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네이버 백과>


순회세자(1551-1563)는 명종 12년 세자가 되었으나 13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래 안내문

 

세자의 묘라 봉분이 그리 높지 않고, 간소했다. 능침은 정자각 방향과 달리 동족으로 약간 뒤틀어져 있다.

 

 

4. 경릉 - 세조의 맏아들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덕종(1438-1457)은 제 7대 세조의 맏아들로 144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에 요절하였다. 의경세자(덕종)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나 이후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임금이 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1437-1504) 한씨는 144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가 되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을 책으로 펴내고 한문 불경을 한글로 풀어쓰기도 했다.

 아들 성종이 여색을 탐하기가 심해 왕비 윤씨와 갈등을 빚자 윤씨를 폐비시켜 사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아들 성종과 함께 주도하였다. 성종이 죽고 즉위한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당하여 폐위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고 보복하자, 병상에 있던 대비 소혜왕후가 이를 꾸짖으니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받아 얼마 후 죽었다. 소생으로는 성종 ·월산대군(月山大君)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있다.

 

 

5. 대빈묘 -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묘

 

희빈장씨(1659~1701)는 조선 후기 숙종의 후궁이다.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며,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삼촌 장현은 역관(譯官)이었으며 무역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재력가였다. 어려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젊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장씨를 배척하던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인현왕후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 세력이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원자로 봉하는 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었으며,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 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이후 숙종은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장희빈만큼 극적 삶을 살았던 여인네가 없어서일까. 그녀의 일대기는 영화로, 도는 TV드라마로 수없이 제작되어, 우리나라 사람치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녀로 들어와서 희빈이 되었다가 왕비로 승격되어, 여성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후궁으로 내려앉아 회한의 삶을 살다가, 한 때 사랑했던 남편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으니 참으로 비통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권력을 탐하여 투기에 눈이 멀어 인척을 중용하며 정계를 어지럽혔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에서 권력을 쥐었던 여자들 중에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얼마이던가. 그리하여 혹자는 말한다. 그녀는 결국 남인들의 꼭두각시로 당파 싸움에 이용되어 한 때를 풍미했다가 바람처럼 꺼져버린, 가련하고 힘없는,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노라고...

희빈 장씨는 경릉에서 홍릉으로 지나는 길 왼 편에 소박한 평민의 무덤처럼 커다란 봉분 없이 소박하게 누워있었다. 본디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1969년 6월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전한다.

 

무덤 앞 상석 뒤에 있는 비석엔 유명조선국왕산부대빈장씨지묘(有明朝鮮國王山府大嬪張氏之墓)라 씌여져 있다.

 

 

6. 홍릉 -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정성왕후(1692-1757)는 서종제의 딸로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렸다. 1724년 경종이 제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세제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어진 성품으로 평생을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757년(영조 33)에 소생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홍능의 정성왕후 오른 편에는 남편을 위한 공간이 빈자리로 남아있다. 당초에 그녀의 남편인 영조와 합장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나, 영조는 동구릉에 정성왕후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 씨와 합장묘로 모셔졌다.

 

 

7. 창릉 - 조선 제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예종(1450-1469)은 조선의 제 8대 왕으로 7대인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세자였던 형(의경세자, 덕종)이 갑자기 죽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병약하여 재위 1년 2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예종의 요절로 형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승계하여 9대 왕으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안순왕후(?-1498)는 한백륜의 딸로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가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타계하자 세자빈이 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원래는 한명회(韓明澮)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461년(세조 7) 죽었으므로, 동궁에 간택되어 들어가 소훈(昭訓)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겼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자 25세의 나이로 청상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다. 조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감쌌다. 1497년(연산군 3)에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가 있다.

 

 

 역사의 이면에 숨어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거나 또는 찾아 읽으면,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순리를 쫓아 의롭게 살아가고자 노력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경외감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을 탐하는 추악함에 몸서리 처지기도 했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았건만, 5백 년의 조선, 통치자들의 삶 속에는 삼강오륜과 인의예지보다는 개인적인 탐욕과 욕망이 더 커 보인다. 유교적 가치관은 통치자들의 위선을 감추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일까.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정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무리 좋은 도덕적 가치관이라도 그것을 얘기하는 사람이 실천궁행하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정치가들이나 사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 복지가 입으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이 되기를 바라며, 과거의 역사에서 오늘의 난제들을 풀어가는 지혜를 깨우쳤으면 좋겠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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