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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사육신 묘

  죽림님의 블로그에서 "사육신 묘"를 보고, 단숨에 달려갔다. 구름이 많아 날씨는 썩 좋지 않았다. 묘역에 있는 동안 먹구름이 몰려들어 행여 비가 내리지 않을까 노심초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일까?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그중에 권력에 대한 탐욕과 집착이 서럽게 가슴을 친다. 권력에 대한 욕심에는 인정사정이 없어 혈육조차 개의하지 않는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어린 단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좌의정 김종서 부자를 참살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이었던 안평대군마저 죽이고,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아버지의 충신들을 악랄한 고문 끝에 참살하고, 그 충신들의 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몰살하고, 여자들은 노비로 몰아버렸다. 그리고는 수족 떨어진,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는, 머나먼 영월로 귀양 보낸 후, 살해하고 말았다. 인륜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국왕의 극악무도함이 이와 같으니, 그 밑에 빌붙어 부귀영달을 누리던 신하들은 더 말할 나위 없겠다. 어찌 보면 조선의 건국부터 그런 불행을 잉태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성계의 쿠데타, 그리고 개국과정에서 저지른 고려 충신들에 대한 도륙 행위, 왕권을 잡기 위한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의 잔혹한 골육상쟁을 어린 시절부터 듣고 보았을 수양대군은 할아버지들의 무자비한 살육들로부터 그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보다도 더 잔혹하게 자신의 친동생 안평대군마저 사사시켜 버렸다. 이방원은 그래도 목숨 걸고 싸우기까지 했던 제 친형 방간은 죽이지 않았다.

  신의를 지키며 변절하지 않고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의로운 신하, 일곱 분을 모신 곳. 몇 번 차창으로 스치면서도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의로움의 표상으로 외우던 그분들이었건만,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우리나라에서 그와 같은 신망 있는 분들을 거의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9호선 노들역에서 내려 노량진 방향으로 조금 걸으니, 기와 얹은 벽돌담이 나타났다. 담을 끼고 모퉁이를 돌면, 사육신 공원 입구가 있었다.

 

  입구에서 조금 지난 비탈길에 충신과 열녀들을 기리는 홍살문이 서있다.

 

오르는 길 오른 편에 서있는 안내문.

 


작은 삼거리 이정표

 


사육신 사당으로 들어가는 不二門

 


불이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사육신 사당인 의절사(義節祠)가 있다.

 


의절사 내부, 흰 벽에 세워진 일곱 분의 위패, 방명록에 서명한 후 향을 피우고, 충신들께 배례드렸다.

 


사당 뒤쪽으로 나가는 문, 사당 뒤에 사육신 묘소가 있다.

 


  묘역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문 뒤에서 만난 첫 번째 묘역은 김문기, 박팽년, 유응부, 이개... 네 분을 모셨는데, 맨 위가 김문기 선생의 묘이다. 이끼 없는 새 비석으로 미루어 근래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겠다. 비석에는 하나같이 관직명과 이름을 쓰지 않고 0 씨지묘라 새겨 넣었다. 어쭙잖은 미관말직을 지낸 벼슬아치들도 온갖 치장을 다해 봉분을 높이고 비석에 과장 섞인 관직명을 새기는데 말이다. 김문기 선생의 묘는 허묘이다.

 


박팽년 선생의 묘

 


유응부 선생의 묘

 


이개 선생의 묘

 


아래 묘역으로 내려오면, 첫 번째가 류성원 선생의 묘(허묘)이다.

 


두 번째로 성삼문 선생의 묘

 


맨 아래의 하위지 선생의 묘(허묘), 아래쪽에서 올려 본 사진이다.

 


  묘역의 뒤쪽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오른쪽 맨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보니, 네 분의 묘가 남서쪽을 향하여 누워 있고, 솔숲이 우거진 뒤로 고층 아파트들이 둘러 서있었다. 내가 서있는 위치는 김문기 선생의 묘 바로 뒤 언덕이다.

 


  역시 위에서 내려본 아랫녘의 묘. 류성원, 성삼문, 하위지 선생은 서쪽을 향하여 누워 있었다. 때마침 한 떼의 참배객들이 찾아들었다. 윗묘역과 아랫묘역 중간쯤에서 촬영했다.

 


위 쪽 묘역에도 참배객들이 몰려와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랫 묘역에서 올려본 사진.

 


  되돌아 나오는 길에 아쉬움으로 미련감이 남았다. 사당의 뒷문 바로 뒤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뒷문 바로 뒤, 가운데가 유응부 선생의 묘이다.

 

 

사당 뒤쪽, 측면에서 바라본 경내.

 


 자유당 시절인 1955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을 받아 김광섭이 지은 글이란다. 아이러니하게 이승만 대통령도 권력을 탐하며 독재로 연명하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의절사

 

 

신도비각

 


비각 안에 있는 비석, 유감스럽게도 자잘하고도 수많은 한자들을 읽을 수 없어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안내문이라도 옆에 세워두면 좋을 것을...

 

 

불이문에서 바라본 사당

 


  사당에서 나와 전망대로 걸어갔다. 동산 위에는 박물관이 있었는데, 굳게 잠겨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흉측한  블록담이 서있고, 그 위에 녹슨 원형 철조망이 쳐 있고,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아래는 군사보호구역이니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분단의 슬픈 현실이 사육신의 묘역까지 파고들어 가슴 아프게 한다. 군부대라 하더라도 흉하지 않게 담장을 단장하면 안 되는 것일까?

 

 

  박물관 뒤로 공원과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로 나가니, 한강과 철교, 그리고 멀리 북쪽으로 삼각산이 보였다. 날은 흐렸지만 시정은 좋았다. 사진을 찍으려니, 앞쪽의 군부대 시설물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항공사진으로 본 사육신 묘

 

사육신 묘 안내문

 

 사육신 -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복위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성삼문(成三問:承旨)·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이개(李塏:直提學)·류성원(柳誠源:司藝), 유응부(兪應孚:中樞院同知事)와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 현창된 김문기(金文起:工曹判書)를 말한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3공(公)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류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김문기의 문중인 김녕김씨는 이들보다 40년 뒤인 1731년(영조 7)에 복관(復官)되었다.

 

 사육신 문제는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기존 사육신의 기록도 존재하고 김문기 사육신론도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에 대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 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현창(顯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박팽년

 

가마괴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向(향)한 一片丹心(일편단심)이야 變(변)할 줄 이시랴

 

성삼문


이 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 장송 되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할 졔 독야청청하리라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恨(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採薇(채미)도 하난것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땅에 낫다니.

 

 

 국영방송에서 요즈음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가 인기란다. 초창기 한 두어 번 보다가 그만 접어 버렸다. 수양의 탐욕에 무참히 살해당한  김종서 장군의 슬픈 이야기를, 어이없게도 수양의 딸을 내세워, 있을 수도 없는 사랑놀음으로 사탕발림해서 방송하고 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김종서 장군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원수의 딸과 사랑놀음에 빠지게 한다는 것은 진실로 어불성설로 작가의 과도한 만용이다. 역사 드라마는 엄격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까딱하면 국민들로 하여금 허구를 진실로 착각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주의 남자'란 타이틀도 엄격히 말하면, 표절이다. 몇 년 전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적이 있었다. 역시 연산군을 다룬 사극영화로 사실성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의 동성애를 다루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왕의 남자', '공주의 남자', 어쩌면 '왕비의 남자'란 드라마나 영화가 나올지도... 그러고 보니 왕비의 남자는 벌써 영화화되었다. 수애와 조승우가 열연한 '불꽃처럼 나비처럼'이란 영화는 명성황후의 숨겨진 사랑을 다뤘는데, 그야말로 황당한 만화 영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역사 드라마가 모두 이런 식이다. '계백' '태왕사신기' '주몽' '연개소문''대조영''김수로' '무사 백동수' 등등, 대부분이 황당한 내용에다 엄청난 물량만 쏟아부어 연애 중심의 흥미 위주의 엉터리 드라마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위인들의 이야기를 흥미중심으로 허황하게 다루는 것보다는, 얼마 전 '추노'처럼 비록 실존 인물들을 다루긴 했으나, 이름 없는 민초들이 당시대에 살아가는 아픔을 다루는 것이, 훨씬 사실적이고 보다 큰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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