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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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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미륵을 모신 국사암 쌍미륵사 언덕에서 내려오면서 포장도로가 오른쪽으로 휘어지고, 왼쪽은 차량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시멘트길인 작은 삼거리에 국사암 이정표가 서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을 줄 알고, 삼거리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국사암을 향해 걸었으나, 좁은 시멘트길이 끝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와 차를 타고 좁은 시멘트 도로로 조심스럽게 한참을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피할 공간도 없어 불안했으나, 국사암 주차장까지 탈없이 올라갔다. 차량출입금지란 팻말을 보고, 까맣게 보이는 올려다 보이는 국사암을 보고 걸어 올라가려니 맥이 빠졌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그 가파른 비탈길을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스쳐 올라갔다. 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차에 올라 비탈길을 오르는데, 그런 급경사는 처음 올라보는 ..
안성 서일농원 전통 된장으로 농원을 일군 서일농원, 최근 MBC드라마 촬영지로 이름이 높아, 호기심에찾았다. 요즘은 집에서도 담그지 않는 된장, 간장, 고추장을농원에서 만든다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그덕에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를 얻고 있으니, 우리네 전통 조리법이 각광받는 것 같아서 보기에 좋았다. 널찍한 주차장엔 이미 많은 차들이 있었다. 마치관광지처럼 유명세를 타는 모습이었다. 안내도를 따라 농원을 한 바쿠 둘러 보았다. 넓은 부지에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고, 주인이 만든 된장으로 맛을 내는 식당을 내고, 그 뒤엔 무수한 항아리들이 구수한 된장 냄새를 풍기는 장독대를 펼쳐 놓았다. 작은 구릉 같은 언덕엔 과수원을 꾸미고 전망 좋은 곳곳에 정자를 만들어 운치를 주었다. 이른바 녹색 산업이다. 우리의 먹거리를..
곰배령 가는 길목 "세파에 지치고, 병든 자들이여! 이곳으로 오라." 병들고 찌든, 세속의 삶에 지친 사람들의 재활처라는 곰배령. 내비게이션 달랑 하나 믿고 닥치고 찾아갔다. 조침령 터널 부근의 작은 삼거리에서 북쪽의 좁은 길로 접어들어, 계곡을 왼쪽에 끼고 한참을 올라가니 작은 다리가 있는 삼거리에서 포장길은 끝이 났다. 길가 이정표에 곰배령 주차장 안내판을 보고 조심스럽게 좁은 길을 터덜거리며 올랐다. 비포장 도로여서 먼지가 몹시 났다. 맞은편에서 차가 내려오면 길가에서 대기하다가 천천히 교행했다. 길 오른쪽으로 진동분교장이 있고, 드믄드믄 펜션들이 들어서 있었다. TV에서 보던 산골 풍경이 아니라 별장 같은 펜션 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적잖이 실망했다. 이윽고 찾아간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
추억 속의 강촌역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강촌역은 폐쇄되고 철로가 뜯겨나갔다. 젊은이들로 붐비던 플랫폼엔 포클레인이 시멘트를 뜯어내며 새로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인근의 레저촌엔 사발이 대여 영업이 한창이어서, 좁은 길을 사발이 오토바이들이 떼 지어 다니고 있었다. 향후 어떤 모습으로 바뀔는지... 간간이 역사를 찾는 사람들은 퇴락한 역사 안에서 추억이라도 캐내듯이 지난날의 흔적들을 더듬고 있었다. 기차가 서던 플랫홈엔 철로가 없어졌다. 강촌역 아래, 한산해진 카페 풍경 강촌역에서 춘천 방향으로는, 강촌 IC에서 춘천으로 나가는 새로운 교량이 놓이고 있다.
사라지는 낭만 열차, 김유정역 경춘선 전철이 개통이 되면서 김유정역은 폐쇄되어, 앙상한 건물만이 홀로 세월의 풍상을 겪고 있었다. 본디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 마을이자춘천의 남쪽인 이곳 실레마을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 7월 25일 사설철도인 경춘선이 놓이면서 신남역이 들어섰었다. 그 후, 춘천 - 서울간 완행열차만 운행되다가 보통급행이 생기며, 무궁화호가 지나다녔었다. 김유정을 기리고자 2004년 12월 우리나라 철도역에 최초로 역이름에 인명을 붙여 김유정역으로 개명하였다. 2010년 12월 12월 21일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본래 있던 이 역사는 폐쇄되고, 역사의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새로운 전철역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과거의 낭만을 지키려는 듯 퇴역한 무궁화 디젤기차가 쩍쩍 갈라진 누더기 페인트 옷을 입고 춘천을 향하여 ..
세월이 비껴 지난 왕곡마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왕곡마을은 함경도 민속마을이라 해야 알맞겠다. 마을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경주 양동마을과 비슷해 보였으나 양동마을에 비해 양반과 상민 가옥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14세기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 뒤,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 왔다. 특히, 동학혁명 때 동학민들이 흘러들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함경도식 전통한옥과 초가집들이 원형을 유지한 모습으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왕곡마을은 고려말부터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이어온 전통민속마을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
동해 최북단, 대진항 풍경 동해 최북단 대진항에는 이제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었다. 파아란 5월의 하늘 아래 싱그러운 신록사이로 펼쳐진 맑은 동해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이 아니었다면 어디보다도 평화로울 대진항은 표면적으로는 긴장감을 감추고 있었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북한이 고향으로 그리운 고향 근처에 살고 싶어 이곳에 산다고 한다. 넓은 동해로 나가 해안을 바라보면,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바다에서 해금강도, 금강산도, 먼발치 바다에서나마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땅도 바라볼 수 있기에,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38 이북 땅인 이곳은, 속초부터 주민들의 말씨도 함경도 말씨에 가깝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념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한 겨레 한 형제가 억지로 갈라서서 철천지 원수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지, 분단의..
동북단 최고의 휴양지 화진포 1. 화진포 해변 건봉사 다음 코스로 찾은, 70년대 친구와 들렸었던 화진포. 넓은 모래사장과 호수의 맑은 물을 즐길 수 있는 동해안 북단의 화진포 해변이다. 맞은편 산자락 중턱 건물은 수복 전 김일성이 묵었다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 앞 화진포 호숫가에는 경쟁하듯, 자유당 시절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별장과 대통령 이승만 별장이 있다. 38 이북의 서늘한 기후에 바다와 호수를 관망하며 즐길 수 있어, 한 때 최고의 권력을 지녔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별장을 두고 휴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화진포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월의 뜨거운 햇볕이 여름을 방불케 했다. 남북분단의 현실이 아니라면 경포해변만큼이나 유명한 명소가 됐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자체의 노력 탓인지, 주변이 아름답게 정비되어 ..
안스러운 서삼릉 고양시 원당에 있는 서삼릉, 3 릉 중 중종의 아들 인종의 능인 효릉은 개방하지 않았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철종의 능인 예릉만 개방하고 있었다. 서삼릉으로 가는 길목에 농협대학이 있고, 서삼릉 주변엔 경마 교육원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았다. 능안에서는 방문객들이 그늘 아래돗자리를 깔고 쉬거나, MT 나온 젊은이들이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여유로운 풍경으로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 단위의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소풍장소로 좋을 듯했다. 희릉과 예릉 만을 개방했기 때문에 산책 코스가 짧고 볼거리가 많지 않다. 애초에 넓은 권역임에고 불구하고 개방된 곳이 적어 안타깝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조선왕조의 능역으로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전주 한옥마을 너무 늦은 시간에 전주에 도착했기에 밤풍경만 볼 수 있었다. 오목대 아래 한옥마을 입구에서 우회전해서 주욱 들어가니, 오색 가로등이 걸린 한옥마을 풍경이 고풍스러웠다. 세트장 같은 서울 남산한옥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기가 발랄한 도심이었다. 하기사 조선왕조의 정신적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어둠 속에서 관광 안내소의 한옥마을 약도를 보고, 경기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큰길 따라 수박 겉핥듯 산책하며 이동했다. 특히 경기전 앞의 전동성당은 ISLAND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본 풍경이어서 그리 생소하지는 않았다.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성당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었다. 이곳 전동성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지라는 것은 기념물을 보고 처음 알았다. 성당중앙, 고풍 어린 종탑의 머리 부분은 로마..
2012 고양국제 꽃박람회 바야흐로 봄이 되니, 이곳저곳 볼 것이 참으로 많다. 이른 봄꽃인 벚꽃은 이미 시들어 떨어지고, 본격적인 봄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낼 때이다. 때마침 일산 호수공원에서 국제 꽃박람회가 열려, 호기심에 봄꽃들을 즐기러 찾았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만큼 우리 주위에 볼 것이 없어서이겠다. 때문에 전람회, 축제라면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든다. 주차할 곳도 마땅하지 않은 데다가, 푸대접받기 일쑤이기 때문에, 내 개인적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 이 번엔 그동안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처음으로 꽃박람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주차료는 2000원이었고, 입장료는 성인 기준 1인당 1만 원이었다. 놀이 공원도 아니고 공공기관에서 개최하는 박람회인데 1인당 만원씩 하는 입장..
비오는 날의 남도 풍경 남도 여행 내내 빗속의 강행군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목적지 도착해서도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되돌리기 일쑤였다. 대기상태로 꺼내 논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살펴보았지만 빗줄기 속을 뚫고 나가기는 엄두조차 못 내었다. 남해의 길은, 섬 전체가 구불구불한 슬로우 로드(?)였다. 비까지 내리니, 어쩌다 관광버스가 길을 막고 앞에서 달리면, 한참을 그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녀야 했다. 목적지 보리암에 도착했는데, 주차장 안내 직원이 구름과 안개, 빗발이 들이쳐서 미끄럽고 위험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나오며, 남해의 명소를 찾아보았으나, 생각 없이 떠난 길이라, 우왕좌왕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엉뚱한 곳에 가있기 일쑤였다. 내비의 도움을 받아 찾은 곳이 다랭이 마을이었는데..
비내리는 광한루 오랜만에 광한루로 나들이했는데, 새벽부터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과 기름진 평야를 가진 남원땅이다. 예로부터 천혜의 고장이라 춘향이 이야기 같은 고전이 나왔나 보다. 그런데, 광한루 부근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70년대 토속적인 광한루의 풍경은 간데 없이 사라졌고, 깔끔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멀리 지리산을 휘감은 구름들이 무겁게 누르고 있었지만, 춘향전의 배경이기도 한, 광한루 풍광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려서인지 오히려 한적한 분위기가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더욱이 지금 내리는 비는 내게는 잠시 불편하지만, 봄 가뭄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싶다. 농사짓는데 더없이 소중한 비라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겠다. 춘향이 뛰었다는 그네터가 ..
안산 다문화마을 특구 안산역 앞 다문화 거리에는 역시 이방인들의 거리였다. 다문화 거리 중심가, 파출소 뒤의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놀이도 했고, 더러는 장기판을 벌였고, 더러는 양지 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끼리끼리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로 쓰인 거리의 간판들... 연변 억양의 까랑까랑한 북한 말투가 더 많이 들려왔다. 지난번에 들린 적이 있어 풍경이 낯설지는 않았으나, 단조로운 동선과 풍경에 금방 지루해지고 말았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행인들의 얼굴이 찍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허공을 향해 셧터를 누르듯 몇 컷 촬영하고 말았다. 안산시 외국인 주민센터 주민센터 앞에 있는 약도 다문화 거리 중심가 다문화 거리 열대 과일 만두, 빵 등 튀김가게 이국적 풍경의 인도네시아 음식점 돈을 벌기 ..
풍차가 있는 풍경 - 소래습지 생태공원 바람이 불었으나 그리 차지는 않았다. 소래 습지 생태공원에는 봄맞이 상춘객들이 모처럼 봄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습지공원 서북 쪽으로 아파트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어쩌면 풍차는 생뚱맞아 보이기도 했다. 현대적인 아파트와 고가도로, 고압선을 나르는 송전탑 등 시설물들 때문에 풍차가 주는 이국적이고도 목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요리저리 자리를 이동하며 구도를 짜보았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결국 낭만적인 풍차 사진을 만들지 못하고, 그 넓은 습지공원의 산책로를 봄맞이 운동삼아 하염없이 걸었다. 소래 생태공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순천만과 유사했다. 뻘밭에 갈대가 가득한 것은 순천만과 비슷했지만, 철새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는 순천만보다 돋보였다. 옛날 염전과 소금 창고들이 이곳의 지난 역사의 흔적을 ..
등대가 있는 풍경-제부도 선착장 꽃샘바람 심한 날, 제부도 선착장 풍경. 추운 날씨임에도 성급한 상춘객들로 제부도 안이 붐볐다. 2-3년 사이 제부도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제부도에 여러 가지 설비투자를 많이 했나 싶었다. 제부도 서쪽 해안에는 바다 쪽에 나무로 데크를 만들어 관광객들의 보행을 돕고 있었고, 선착장 등대 주변에는 바다낚시터까지 조성해 놓았다. 망둥어가 많이 낚인다는 안내문도 보였고... 등대 아래에서 바라본 누에섬, 전곡항에서 바닷길이 열리면 누에섬까지 걸어갈 수 있다. 제부도 선착장 등대 등대 주변 바다 낚시터 바다낚시터 썰물로 열린 제부도 바닷길
매바위-화성시 제부도 꽃샘추위라던가. 화창한 날씨에 취해서 화성시 제부도에 나갔었다. 때마침 바닷길도 활짝 열려 바닥을 드러낸 시멘트 길을 따라 봄기운을 만끽하며 섬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황해의 꽃샘바람은 거세고 차가웠다. 봄맞이차림의 가벼운 옷차림이 낭패였다. 체감온도가 낮을 것이란 예보가 있어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꽃샘바람은 차갑고 매서웠다. 바람 때문에 눈물이 흘러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피사체가 흐려져 초점 잡기조차 어려웠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제부도의 매바위가 성에 차지 않아 물이 빠진 틈에 매바위 근처까지 다가서서 서해의 갯벌과 우람한 매바위 풍경을 바람 속에 바라보았다. 성급한 상춘객들도 추위 때문에 바위 뒤에 웅크리고 서서 바람을 피했다. 그래도 메뚜기도 한철이라는데... ..
수기 해변 - 시도 신도는 시도, 모도, 장봉도와 함께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에 속해 있다. 신도 선착장부터 시도와 모도까지는 자동차로 돌아다닐 수 있다. 장봉도까지는 다리가 놓이지 않아 배를 타고 더 가야 한다.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처음 가보는 섬여행이라 느낌이 묘했다. 작은 섬들의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아기자기한 서해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의외로 등산하는 사람도 많았고,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 도보 트랙킹하는 사람 등등, 따뜻한 봄햇살에 상춘객들이 제법 많았다. 들머리- 신도 선착장 시도의 최북단 언덕 위에 있는 드라마 '슬픈 연가'의 세트장. '슬픈 연가'는 2005년 mbc 드라마로 권상우와 김희선, 연정훈이 출연했다고 한다. 언덕 위 서북쪽 절벽 해안이라 탁 트인 전망이 좋았다. 북쪽으로 강화도 마니산이 한눈..
갈매기와 해협을 건너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신도로 가는 1.8 km 해협을 배를 타고 건넜다. 소요시간은 10 여분으로 가까운 거리였고, 승용차 운임은 대당 왕복 20000원이었다. 거리가 먼 장봉도는 왕복 30000원이다. 신도에서 시도와 모도는 교량으로 이어져 승용차로 일주할 수 있다. 시도에는 해안이 예쁜 수기해변이 있어서 주변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고, 이웃인 모도에는 배미꾸미 해변에 30여 점의 조각이 전시된 작은 공원이 있었다. 바다 바람이 찰 것 같아 선실에 앉았다가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들의 날갯짓에 후다닥 갑판으로 나갔다.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에 화답하며, 배주위를 돌면서 던져주는 새우깡을 찾아 날아들었다. 새우깡을 손에 들고 있으면 두려움 없이 가까이 날아와 날쌔게 새우깡을 찾아 물었다. 새우깡을..
도심 속의 왕릉(선릉과 정릉)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강남 한가운데 선릉과 정릉을 찾았다. 이곳은 본디 한강 남쪽에 자리하여 한적하고 수려한 곳이었겠지만, 현대에 이르러 조국 근대화의 개발정책으로 서울의 최대 번화가인 강남의 한 복판이 되었다. 그 덕에 왕릉은 주변이 훼손되어, 고층빌딩 아래 고개 숙인 모습으로 간신히 왕릉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선조 9 대 성종대왕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왕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유택인 선릉은 오른쪽 청룡 부분의 산자락이 헐려,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도로 곁에 놓여 있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은 성종과 중종의 정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듯했으나, 봉분을 감싸는 배산(背山)이 없어져서, 그 역시 허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
울릉도로 떠나는 길목, 강릉항 경포호수 아래 송정해변에 갔다가 우연히 들렸던 강릉항, 전에는 이곳을 안목항이라 불렀었다. 10년 전쯤 겨울에 이곳 안목항 방파제에서 친구들과 바다낚시를 했었다. 그때 바다낚시 초짜였던 내가 두어 시간 만에 학꽁치를 네 마리나 낚아 올려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했다. 그때 그 생각으로 항구로 들어섰는데, 아아, 상전벽해도 유분수지, 우람한 방파제만 보였던 안목항이 미려한 요트항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잘 정리된 항만 안에 작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고, 수중익선인 쾌속 여객선이 저편에 떠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항구 안을 돌아보았다. 한겨울 거센 해풍이 불어왔다. 추운 탓으로 인적은 끊겼으나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고왔다. 강릉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간다. 처음 듣는 얘기에 여객선 대합..
대관령 양떼목장 밤새 전국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에 태백행을 포기하고 대관령을 찾았다. 강릉에서 대관령 오르는 길에도 눈은 쌓여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녘 비탈엔 눈이 녹아 질척거렸지만, 굽이굽이 커브길 응달은 빙판 그대로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대관령에 올랐다. 잠깐 대관령 옛길로 내려가는 길목에 주차하고 동해를 바라보았으나, 사나운 강풍에 눈물만 흘리고 10 분도 버티지 못하고 차 안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의 여행길이 폭설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옛 대관령에 올라 양떼목장 입구로 갔더니 벌써 많은 차량들이 있었다. 차 안에서 두툼한 방한복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휴게소로 갔다. 안에 들어가 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대관령 강풍에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어떤 이는 스페츠에 아이젠까지 하고..
동해 추암 촛대 바위 언제나 동해에 서면 가슴이 울렁인다. 깊고 푸른 망망대해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으로부터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의 숨결 하나만으로도 벅차게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푸른 수평선 위로 뭉게구름이라도 걸릴 양이면 가슴은 풍선처럼 마냥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소년시대를 훨씬 지나 반세기 이상의 삶을 살아온 지금에도 출렁이는 파도와 흰 뭉게구름, 짙푸른 수평선 위로 날아다니는 순백의 갈매기들은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TV방송 시작과 끝에 나오는 애국가 중 동해 일출 장면으로 유명한 추암의 촛대 바위, 겨울바다답게 세찬 바람이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왔다. 추운 날씨 덕에 인적도 뜸했다. 해안 방어선으로 처 놓은 흉물스러운 철조망들이 눈에 거슬렸다. 빨간 아치 철교를 건너 70년대 풍의 작은 어물전..
관동제일루 죽서루 "......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에 다히고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죽서루 부분인데, 송강의 노래대로 태백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곳 오십천 구비를 휘돌아 동해로 흐른다. 그 오십천 벼랑 위, 암반 위에 팔작지붕의 긴 다락을 짓고, 자연을 벗 삼고 희롱하던 선비들의 풍류가 저절로 그려진다. 죽서루 방문은 수차례였지만, 이 번엔 죽서루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절벽의 험한 바위에 눈이 내려 미끄럽고 위험했다. 게다가 날씨도 추워 장갑 낀 손끝이 아렸다. 밤사이 서울과 중부지방엔 폭설이 내려 교통 대란과 혹한이 찾아들어 아우성이라는데, 이곳엔 희고도 고운 백설이 살짝 뿌리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영월로 가려던 계획..
보령시 천북 굴구이 가을과 겨울, 두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굴 구이. 그 맛을 잊지 못해 일 년에 한 번쯤은 이곳에 들린다. 10여 년 전, 처음 굴구이 단지가 조성되었을 땐, 가건물 안에서 굴구이 판을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 굴을 구워 먹었었다. 아직도 가건물로 대도시 식당만큼 훌륭하지는 않지만, 제법 식탁과 의자까지 갖춰져 펀안하게 먹을 수 있다.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져 공휴일엔 그야말로 문전성시 인산인해다. 수도권인 대부도 인근에서도 굴구이를 하고 있던데, 질과 양으로 따져도 이곳 천북 굴구이를 따를 수 없다. 굴구이판 위에 두세 개가 맞붙은 굴을 수북이 쌓아놓고 불을 지핀 후 잠시 기다리면, 화약 터지듯 굴구이 판 이곳저곳에서 굳게 다문 굴 입술이 팍팍 터지며 열린다. 지글지글 껍질 안에서 익어가는 큼직한 굴을 ..
창경궁 -씁쓸한 추억에 대한 연민 에버랜드, 아니 자연농원도 없었던 1960년대 중반, 어린 시절엔 창경원 나들이가 꿈같은 소원이었다. 전기도 없었던 시절, 보고 싶던 사자나 호랑이는 그림에서만 봐왔기에 창경원 구경 한 번 하고 온 애는 또래의 우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국민학교 6학년 때 수학 여행지는 창경원과 남산 팔각정, 거기에 조금 보태서 배 타고 건너가던 강화도였다. 그것도 돈이 없어서 나는 가지 못했지만... 수학여행 갔던 애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도시락 싸가지고 한 나절 창경원을 나들이한 적이 있었다. 그때 회전 비행기와 목마도 타보았는데, 회전 비행기는 밖에서 볼 때만 화려했지 비행기 안은 드럼통에 널빤지 의자여서 어린 마음에 너무 실망하기도 했었다. 나이 들어 느낀 것이기도 ..
종묘(2) 토요일은 종묘 자유 관람하는 날, 자유롭게 종묘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위해 다시 방문했다. 내외국인이 한데 섞여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관람하고 있었다. 날은 흐리고 쌀쌀했으나 그리 춥지는 않았다. 음기가 잔뜩 서려있다는 종묘엔 밝은 햇살 대신 서늘한 냉풍이 흐르고 있었다. 산책하듯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곳을 돌아다니며 두루 살펴보았다. 지난 방문에 대한 미련감 때문에 찾았지만, 감동은 첫 대면만큼 크지 않았다. 무엇이든 첫인상이 제일 중요한가 싶다. 종묘 정전, 17mm로 한 컷에 담을 수 없어 3 장을 이어 붙였다. 우리나라 최장 건축물로 폭이 101m이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神道 - 제사를 받는 혼백들이 다니는 길이므로 신성한 지역이다. 관람객들이 신도 위로 걸어 다니지 말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
종묘(1)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쉽게 찾지 않는 곳이 종묘라, 모처럼 작심하고 방문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조선 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했던, 태조 3년부터 조성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정전, 신실 7칸 좌우 익실 2칸 규모로 완공하여 정전에 추존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후 세종 3년 별묘인 영녕전을 신실 6칸 규모로 건립하였고, 역대 왕들이 증축해 나갔는데, 임진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건하였고 1863년 현종 2년에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으로 증축하여 오늘의 모습을 이루었다. 1995년에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2001년에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