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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바라나시 사르나트와 갠지스 강

1.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

 

  델리에서 바라나시 가는 야간열차 속에서 새벽부터 에어컨 바람 때문에 발이 시려워 잠을 자지 못하고 3층 침대에서 내려와 오들오들 떨었다. 좁은 침대칸에서 뒤적거리다가 열차 이음새 통로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동터 올 무렵 열차의 출입문을 열고 안개 낀 들녘을 몇 컷 찍었다. 이른 새벽 원주민 한 명이 철로를 향해 쭈그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다.

 

 야간 열차는 3층 침대 열차로 중앙 등받이 부분을 들어 올리면 3단 침대칸이 된다. 열차 칸은 벽으로 구분된 독립 공간이 아니라 커튼으로 가림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통로가 좁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리를 뚝뚝 건드리고 지나가기도 했다. 열차는 공간을 극대화하여 6인용 침대칸 옆으로 작은 통로를 두고 그 옆에 세로로 만든 2인용 침대칸을 만들었다. 저녁 시간에는 열차 안에서 음료를 파는 상인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따뜻한 우유에 홍차를 타서 파는 짜이를 한 잔 먹었는데 그 맛이 제법 좋았다.

 

침대칸을 담요로 막은 열차 복도

 

 인도의 시간 관념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야간열차는 연착을 거듭한 끝에 밤새 13시간 이상 달려 바라나시역에 도착했다.

 

가방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포터들... 운반비는 2 달러... 포터들은 2달러를 벌기 위해 서로 다툰다.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큰 짐을 가진 사람은 포터 사용이 필수이다.

 

  역 앞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삼륜 택시들...

 

 우리를 기다리는 건, 인도 타타 자동차사에서 만든 6인승 소형SUV였다.

 

 

2. 사르나트(녹야원)

 

  뒤죽박죽 순서 없이 뒤엉킨 차량 사이를 뚫고 자동차는 사르나트에 도착했다. 석가께서 해탈 후에 최초로 다섯 명의 남자 제자와 1 명의 여제자를 놓고 설법하셨다는 불교의 발상지이다. 들어가는 입구까지 잡상인들과 거지들이 달려들었다.

 

  '사르나트(鹿野苑)'라는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출요경 出曜經〉에 의하면 과거에 바라나 국왕이 이곳에 이르러 사냥을 할 때에 1,000마리의 사슴을 생포했는데, 사슴의 왕이 하루에 1 마리씩 식용으로 보내주겠다고 애원하여 모든 사슴이 풀려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녹야원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이곳에서 교진여(橋陣如)를 비롯한 5명의 수행자에게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설하여 이들의 귀의를 받았다. 이들의 귀의로 비구(比丘:bhikkhu)가 처음 생겨났으며 이와 더불어 불교 교단이 비로소 성립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초기 경전에서부터 이곳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Kusinagara)와 더불어 불교도들이 순례해야 할 4곳 가운데 하나이다.

 

  이후 아소카 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石株)를 세운 뒤 더욱 뭇신도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초 현장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약 30m 높이의 정사(精舍)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 주위 100여 단이나 되는 감실(龕室)에는 황금 불상과 부조가 있었다. 안쪽에도 등신대의 초전법륜상(初傳法輪像)이 줄지어 있고 1,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등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무렵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에게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2층원탑(二層圓塔)과 부러진 아소카 왕의 석주 등이 남아 있으며 많은 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아소카 왕의 석주 머리에 있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은 인근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데,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르나트 입구

 

  울타리 안에는 거지도 잡상인도 없는 평화의 세상이었다.

 

왼쪽 나무 뒤에, 도장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원형 2층탑이 석가님이 최초로 설법하신 곳이다.

 

 녹야원(鹿野苑) 답게 한쪽에서는 사슴들이 놀고 있었다.

 

  사르나트는 1835년 영국 왕립 고고학회가 발굴했단다. 아래는 사르나트(녹야원)의 배치도, 오른쪽에 둥글고 까만 점으로 표시된 곳이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으로 원형탑이 서 있는 곳이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곳엔 거대한 원형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을 중심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탑돌이 하며 수행하고 있었다.

 

  녹야원 옆에 박물관이 있었는데, 촬영금지 구역이었다. 입구에서 핸드폰까지 철저히 검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다. 박물관은 두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었는데, 왼편은 불교 유적실, 오른편은 힌두교 유적실이었다. 박물관 중앙에서 현재 인도의 국장인 야쇼카왕의 사자석상을 보았다. 불교 유적실에는 세계에서 2번째로 아름답다는 부처님 석상을 보았다.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3. 갠지스강의 힌두의식

 

  저녁식사 후 릭샤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갔다. 릭샤는 자전거에 좌석을 만든 베트남의 시클로와 같은 모양이다. 릭사가 붐비는 자동차 사이를 빠져나갈 때마다, 순간순간이 아찔하였다. 이건 흡사 목숨 걸고 모험을 감행하는 만용 같은 것이었다.

 

  어둠 속에 자동차와 인파를 헤치고 갠지스강 종교의식을 보러 나갔다. 관광객들과 뒤섞인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 유명한 갠지스강 계단 아래로 내려가 힌두 의식을 보기 위해 작은 거룻배를 타고 의식이 치러지는 중앙으로 나아갔다.

 

  갠지스강 계단 끝에 소들도 의식에 참례하려는 듯, 여유롭게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며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배를 타려는 강가엔 사람들이 흘린 오줌물이 지린내를 풍기며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갖은 쓰레기들과 타고 남아 흘러온 작은 꽃등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거룻배를 탔다.

 

  배 안에서 물 위에 띄울 작은 소망 꽃등을 판매하는 아가씨

 

저 마다 작은 꽃등에 불을 붙여 소망을 빌며 갠지스강 물 위에 띄운다. 나는 우리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무수한 소망들을 실은 꽃등들은 작은 심지를 태우며 갠지스강 하류로 흘러 떠 내려간다.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염원들이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강변의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길게 늘어선 단 위에서 화려한 불기둥과 함께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좌우에 몰려든 사람들보다 배를 타고 의식에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무대의 중간, 열기가 뜨겁다.

 

배를 타고 구경하는 사람들

 

 거리가 멀어 힌두 의식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서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노랫소리와 불기둥, 연기들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매일 밤 열리는 뜨거운 종교 열기, 인도는 신의 나라였다. 종교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불교의 발상지이면서도 불교를 믿지 않는 나라,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가 공존하고, 인간과 동물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 공유는 빈곤과 가난이었다.

 

  강가에서 나와 시내로 접어들자, 불 밝힌 상점들과 노점들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엉켜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4. 갠지스강 일출, 그리고 삶의 종말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호텔을 빠져나와 다시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밤공기를 타고 새벽 배에 올랐다. 거룻배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 갠지스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젯밤, 뜨거운 열기 속에 힌두 의식이 열렸던 무대에는 등불만이 휘황하다. 인적 없는 텅 빈 공간이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동이 떠오르며 점점 밝아졌다.

 

 어둠이 걷히며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갠지스 강가의 풍경들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왼쪽의 붉은색 경사면이 그 유명한 갠지스강 빨래터이다.

 

  물 위를 나는 새들은 왜 그리 많던지, 땅 위엔 소와 개, 강물 위에는 새떼들이었다.

 

  드디어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갠지스 강가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불 꺼진 작은 꽃등들은 누군가의 소망을 싣고 정처 없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삶의 마지막 종착역, 갠지스강 화장터에선 이른 아침부터 시신들을 태우고 있었다. 다 타버린 망고나무 숯을 헤치며 유해를 수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신 태우는 연기와 냄새와  끄을음이 빚어낸 진회색빛이 가슴을 울린다. 화장하는 모습은 촬영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당부 때문에 차마 촬영하지 못하고, 그 대신 화장터 바로 아래 사원을 한 컷 담았다.

 

  사원 옆에 쌓여있는 화장용 장작은 망고나무다. 유족들은 이곳에서 저 장작을 사다가 장례를 치른다.

 

 화장터에서 나가는 길은 미로이다.  앞사람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나가야 길을 찾을 것 같다

 

  좁은 골목길에서도 잡상인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5. 삶의 희망 -거리의 일상

 

  큰 길로 나가자, 평범한 하루의 일상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통학 버스를 타고 가다 우리를 보고 활짝 웃는 소년의 미소는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느껴졌다.

 

  시장 거리의 모자, 그리고 먼지 속의 노점상들...

 

  트랙터에 확성기를 달고 거리를 달리고 있다. 아마도 선거 유세가 아닐는지...

 

차창 밖, 멀리에서도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주던 노점상 소녀, 해맑은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다.

 

 강아지마저 한적하게 밭 사이를 가로질러 유유자적하게 걷고 있었다.

 

  유명 관광지 안과 호텔 내부는 깔끔한 문명사회였다. 그러나,호텔 밖에만 나가면, 모든 것이 뒤엉킨 실타래였다. 호텔 안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으며, 바깥 세계에서 화장실도 없이 거리나 밭에서 대변을 보고, 먼지가 피어나는 거리 노점 음식을 먹는 모습을 생각하니 내 자신이 너무 사치해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 경비원에게 치안을 맡기고 집에서 쉬는 부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속한 무리에서 떨어져,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들의 신세로 전락한다면,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삶의 모습들은 한 낱 허황된 꿈처럼 여겨질 것인가? 삼국유사 속의 조신설화가 현실이 될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울타리 하나 차이로 극락과 지옥이 공존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야간열차 에어컨 때문에 추위에 떨다가 결국 몸살이 난 탓이기도 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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