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경공항
오전 11시경 도착한 북경 공항, 하늘은 스모그 때문인지 뿌옇게 흐려 있고, 찌는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청사 밖으로 나오자, 더위에 숨이 턱 막히었다. 스모그로 하늘이 뿌옇게 가려 답답했고 후덥지근한 것이 불쾌감이 밀려왔다.
점심을 먹으로 들른 북경 시내, 현대 아반테 택시들이 많이 보였다.
2. 천안문과 자금성
천안문 가는 길에 만난 도로 위의 승려들, 더운 날씨 탓인지 길거리에 주저 앉아 있는 모습이 몹시 지쳐 보였다.
천안문 앞 광장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과 광장, 그 광활함에 놀랐다.
천안문 뒤 자금성 입구인 남문인데, 현판에 12간지를 써서 오문으로 표현했다. 천안문이 광화문처럼 궁궐의 정문이란 사실을 이곳에 와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왜 봉건적 산물인 청나라 왕궁의 정문을 상징으로 삼는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자금성을 지키는 요새의 성문으로 보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돌로 쌓아 만든 성보다도 더 높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경복궁과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겠다. 그 규모와 건물들의 크기가 우선 사람들을 압도했다. 빨간 기둥과 벽면, 황금빛 지붕들, 뿌연 하늘 빛, 돌바닥, 돌계단과 난간들, 나무도 풀도 없는 삭막함, 돌덩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복사열.... 더위 탓인지 머리가 찌끈지끈해 왔다.
수많은 인파들에 휩쌓여 이리저리 다녀 보지만 더위에 지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자객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나무들을 심지 않았단다. 또 자금성 주변에 높은 빌딩을 못 짓게 함으로써 궁궐의 권위를 더 한층 살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훼손된 궁궐과 궁궐 주변의 잡스런 건축물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자금성의 규모는 경복궁 몇 개를 옮겨논 것보다도 규모가 더 컸다. 대륙을 지배하던 곳이었으니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큰 숲과 풀 한 포기 없는 자금성의 풍경은 너무 삭막해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돌과 황금색 지붕을 떠받치는 빨간 기둥들과 빨간 벽 뿐이었다.
자금성 뒤쪽으로 가자 나무숲과 아기자기한 정원들이 나타났다. 인공적 정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바로 여자들이 살던 곳이란다. 황비가 살던 곳이니 정서적으로 아기자기해야 하겠다.
자금성을 빠져나와 자금성 뒤쪽의 공원인 경산 공원을 둘러 보았다. 자금성을 지으면서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산이다. 숲이 울창했고,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으로, 운치가 있었다. 비로소, 뜨거운 햇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찬물로 머리를 식히고, 계단을 통해 경산공원 전먕대까지 올랐다. 잔뜩 흐려 찌푸렸는 하늘은 우리가 공원을 떠날 때쯤에 드디어 한바탕 소나기를 쏟아 부었다.
공원 너머 풍경인데, 빌딩이 없다. 북경, 도심의 한 복판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3. 우연히 보게 된 이자성 동상
명나라황제 무덤인 정릉을 향해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말을 탄 동상을 보았다. 동상의 주인공은 이자성, 바로 명나라를 몰락시킨 농민군의 수장이다. 아자성은 농민군을 동원하여 명나라 황제를 굴복시키고, 40 여일간을 천하의주인으로 군림하지만, 동북 오랑캐라고 여겼던 여진족에게 쫓겨나고 만다. 그 여진족이 바로 청나라이다.
이자성은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1644년 3월 19일 北京을 점령했다.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에서 도망나와경산 동쪽 비탈 홰나무(槐树) 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고,그의 죽음과 동시에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말았다.
그 해, 5월 27일 후금의 누루하치의 14남인 도르곤은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吳三桂)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한 뒤,북경에서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임을 선포하였다. 같은 해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에서에서 청(淸)으로바꾸었다.
우리가 업신여기며, 오랑캐로 멸시했던 여진족이 중화의 주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들에 의해 두 번이나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참으로 국제정세에 아둔한 조선조 정치가들과 제왕들이었다. 눈앞의 작은 탐욕을 위해 우리 정치가들은 반정으로 왕을 교체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왜적에게 7년 동안이나 전 국토를 유린당한지 40년도 안 된 세월에, 북쪽 오랑캐로만 여겼던 여진족, 청의 침략을 두 번이나 받게 되는 것이다. 대책도 없이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왜란 때는 왜적이 입성하지도 않았는데, 왕궁을 비우고 신의주까지 야반도주해 버린 전철을 똑같이 밟고 말았다.
백성들에겐 가혹하리만큼 참혹한 복종을 바랐으면서도,그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비겁한 조선조 왕들이었다. 현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북진통일을 외치며 백성을 억압하던 늙은 대통령은 6.25개시 3일도 버티지 못하고 백성들을 버리고 내빼 버렸다. 그리고 한강다리를 끊어 자신의 생명은 부지하고, 한밤중에 다리가 끊긴 것도 모르고 걸어서 남쪽으로 피난하는 백성들을한강에 빠져 죽게 하고 말았다. 수복 후에는 지켜주지도 못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역자라며 광분해서 총칼을 휘둘러댔고...
정치가들이 제발 정신차려야 한다. 그들을 뽑아내는 백성들, 책임이 매우 크다. 왕조시대엔 세습제였으니 어쩌는 수 없지만 지금은 백성들이 선출하니까, 정치기를 똑똑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다.
각설하고 이자성은 베이징에서 상주(商州, 지금의 산시성)로 도망쳤다. 그는 계속 패퇴를 계속하다가 북경을 함락했던, 그 이듬해 1645년 통성(通城, 지금의 湖北省 通山)에서 명나라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세력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른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가 실패한 비운의 영웅인 셈이었다. 공산당들에게는 진정한 영웅으로 존경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4. 정릉(명 13릉)
정릉(명 13릉)은 중국 명대의 13 명 황제의 능묘로서,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0km 떨어진 창평현(昌平縣) 천수산(天壽山) 기슭에 있으며, 1409년 장릉을 시작으로 1644년 사릉까지 200여년에 걸쳐 조성된 명나라 황제들의무덤군이다. 13릉 대부분은 개방되지 않으며, 영락제의 장릉,윤경제의 소릉, 만력제의 장릉만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특히 이정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고 중국 중점 관광 명승지이며, 1959년부터 대외적으로 개방되었다.이 중, 명나라 황제인신종 만력제의 능이 정릉인데,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명군을 파병한 인물이다. 재위 48년 동안 20여년 이상을 황궁에서 나오지 않았고, 정사를 등한시하여 무능력한 황제로 명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정릉 앞에 아무 글씨도 쓰여있지 않은 무자비가 있는데, 이는 황제의 치적이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정릉 지하궁에는 만력황제와 효정, 효단, 황후가 모셔져 있었다. 이 세 명의 관은 모형으로, 실제 관은 모택동 시절 문화혁명 때 강청이 모두 부셔버렸단다.
정릉앞의 거북 비석
정릉 입구
규모가 큰 만큼이나 조경도 훌륭했다. 역시 대륙의 기품이 있었다.
정릉의 주인들이다. 가운데가 명나라 신종, 만력제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고마운 황제이다. 그 덕에 명나라는 망해버렸지만...
정릉 발굴당시 모형
그림에 있는 황비의 관
지하궁전 입구.
관이 있던 자리에 사람들이 뿌린 지전만이 수북히 쌓여 있다.
지하궁전, 황제의 의자.
만력제의 모형관. 황제의 영험을 바라는 후손들이 퍽이나 많다.
만력제의 치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무자비.
거대한 황릉을 보고 나왔다. 우리나라엔 이같은 능을 볼 수 없다.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화의 황제들만이 누렸던 특권이다. 중국을 여행하며 느낀 것은 이곳저곳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너무 많아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조그만 돌부처 하나까지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데, 대륙은 그저 그렇게 수수하게 여기니 보다. 가히 중국은 명승지와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하다.
정릉 가까운 휴게소
5. 만리장성
만리장성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 풍경. 웃통 벗은 발가숭이 어른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
만리 장성 오르는 케이블 카.
케이블카를 타고 장성에 올랐다. 케이블카를 퍽이나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이다. 덕분에 편하게 오르지만...
장성 안에 화장실이 멀어서 그런지 으슥한 곳엔 영락없이 대륙인들의 지린내가 진동했다. 우리나라라면 큰 일로 여길 텐데...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치르나 보았다.
산과 산을 막아 쌓아올린 장성
아기자기한 우리나라 산성과는 달리 역시 대륙의 기품이 있어 보였다. 웅장하고 장대한 것이 만리에 걸쳐 축성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더위에 지쳐 별로 신이 나지 않았다. 수원 화성보다 아름답지도 않았다. 한적한 다른 곳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안고 다시 케이블 카를 타고 원 위치로 내려왔다. 그토록 한 번 가보기를 열망했던 만리장성이었는데, 그 감동은 그리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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