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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타이뻬이-화련-야류

 우리의 이웃인 타이완 방문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일본과 중국엔 갔었는데, 우리나라 경제 수준과 비슷하다는 대만은 어떤지 궁금했다.  십 년 전 태국 갈 때 한 번 타이베이 공항에만 잠깐 내려 환승한 일이 있긴 했는데, 그거 가지고 대만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옛날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오봉선교사의 고산족 교화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았고, 한 때 동병상련 격으로 서로를 아끼던 나라였다가 국교단절 이후 웬수진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2010년 1월 10일 아침은 너무 추운 날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인지 공항 안에도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창밖엔 눈 덮인 활주로에 꽁꽁 얼어버린 것 같은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무료한 가운데 대합실에 앉아서 두리번거리노라니 투터운 옷을 입은 승무원들이 먼저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공항에 일찍부터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는 건 정말 너무 지루하고 짜증 나는 일이다.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비행장 안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09시 10분 타이완행 비행기는 잔뜩 흐려있는 눈의 나라를 이륙했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면, 며칠 동안이라도 추위를 피해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대만 해안에 접근하자마자 푸른 대지가 눈에 들어오면서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었다. 2시간 30여 분 만에 눈앞의 세계는 순백의 대지에서 녹색의 대지로 바뀌었다.

 

 착륙 후 통로를 따라 입국심사대로 이동했다.

 

두꺼운 점퍼를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스웨터를 걸치고 나서 입국심사를 받았다. 입국심사는 의외로 간단하고 빠르게 끝났다. 입국관리 여직원이 비교적 상냥하게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중 시가지 풍경. 제일 호기심이 생길 때다. 생소한 이국풍경이 차창으로 스쳐 지나갔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아마도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쯤 될 것 같았다. 처음 방문한 곳은 충렬사로 국공내전과 항일운동 때 전사한 군인과 열사의 영령을 모신 곳이란다. 매시간 근위대 교대식이 볼거리라는 설명을 듣고 구경을 했는데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다만 건물의 좌우, 뒤 쪽에 열사들의 흉상을 세우고 그분들의 행적을 지도를 곁들여 벽에 기록하여, 열사들을 쉽게 이해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보기에 좋았다. 우리나라 분들은 아니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것은 고귀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동작이 느리고 컸다. 매우 진지하게 아주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충렬사 건물에서 바라본 정문의 안쪽 모습. 타이완 본토 아니면 볼 수도 없는 중화민국의 깃발이 펄럭였다.  우리나라 현충원 같은 곳인데, 외국인들이 한국관광 와서 첫 코스로 들르는 곳이 현충원이라면 한국인들은 모두 포복절도할지도 모르겠다. 현충원에 관광을 간다니 말이다.  영국 왕실 근위병 교대식도 아니고, 그 잘난 보초 교대식을 구경하러 충렬사에 간다고?    그만큼 대만에 볼거리가 없단 말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출신 화교였다는 가이드는 대만이 한국보다 GDP가 높다고 입에 침을 튀겼다. 그래봐야 우물 안에 개구리지 누가 알아나 준대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만 사람들의 치기가 가여워졌다.

 

 고궁박물관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말을 듣고 기대감이 컸다. 장개석이 1949년 중국 본토에서 쫓겨갈 때, 국보급 유물들을 모두 빼돌려 대만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고궁 박물관에는 중국의 고귀한 유물들이 많아서 본토보다도 볼 것이 많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었다. 박물관 앞을 지나가는 길에 얼른 차창을 통해 한 컷 찍었다.

 

관람료는 대만 화폐로 120원, 우리나라 돈으로 4800원 정도.(대만 1원 : 한화 40원) 관람을 위해 차량에서 내려 들어간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데 유리로 된 천정에 한자로 쓰고 낙관까지 올린 지붕이 이채로웠다.

 

 박물관 1층 밖의 모습. 쫀쫀하게도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했다. 뭐가 그리 자신이 없는 건지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유물이라는 것들도 소품 중심이어서 별로 볼 것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대충 훑어보고 지나왔는데도 다리만 아팠다.  박물관 내부 유물들을 본 소감은 기대 이하였다. 고대 중국 유물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기대감이 컸었는데, 우리가 본 것은 도자기, 옥 가공품, 청나라 때 목가구, 진한시대 청동기 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유물 전체를 전시할 수 없어서 조금씩 유물을 바꿔가며 전시한다고 하는데,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소품 위주 전시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마도 대표적인 전시물은 비취로 조각한 옥배추인 듯싶다. 작은 옥돌에 배추와 배춧잎에 앉은 메뚜기를 조각해 넣었다.  기념품 가게마다 그 옥돌 모조품이 있는 걸로 보아 가장 인기 품목임이 틀림없다.  입구에 카메라를 보관했다가 되찾아 푸른 하늘에 대고 펑펑 찍어 댔다. 

 

다음 코스는 시내 한가운데 있는 청룡사였다. 단순한 부처님을 모신 절이 아니라, 불교에 도교까지 혼합된 곳으로 많은 타이베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라는데, 온갖 장식들을 달아 휘황찬란했다. 사람들이 피우는 향불연기로 매캐했다. 

 

저마다 준비해 온 음식물들을 접시에 담아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자신들의 소망을 빌고 빈단다.

 

남녀노소 없이 긴 향을 피워 이마 위까지 올리며 소원을 빈다. 절 안에는 향불 냄새로 가득했다. 자신의 소망을 비는 것은 한 중 일 모두 같은데, 향불 피우는 것은 우리나라가 가장 간단해 보였다. 일본이나, 중국, 대만 모두 향불 냄새로 숨쉬기 곤란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향불 기원이 아니라 공손하고도 정성스럽게 엎드려 절하며 발원하는데, 그 정성이 깊고 간절해 보인다. 그나저나 결국 인간의 소망은 기복이 본능이겠다. 중생을 위하고 인류를 위한다는 것도 겉으로 포장된 거룩한 이념 덩어리일 테니까...

 

 재물에 대한 소망을 비는 곳이다. 재물을 관장하는 신은 "관우"다. 우리나라에도 "관묘"가 있다고 들었는데, 듣기만 했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만의 마을에서 "관우" 사당을 많이 보았다. 안에 앉아 계신 분이 바로 관우이다.

 

 절 앞의 황룡 분수다. 청룡사인데 용은 아이러니하게도 황금색이다. 그렇다면 청룡사라고 부르지 말고 황룡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청룡사 옆 야시장 중 먹거리 포장마차 골목이다. 야시장 풍경은 우리나라와 비슷했는데, 특이한 것은 시장 안에 뱀 고기와 자라 고기를 파는 곳이 많았다. 사진 촬영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그들도 혐오식품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타이베이 고속도로. 버스 앞 유리창의 난반사 때문에 하단부에 줄무늬가 생겼다. 대부분의 차들은 일제들이다. 한국 자동차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다 켓츠(클릭), 마티즈, 스타렉스 같은 차들이 보이긴 했지만 유럽 자동차보다도 적었다. 마치 일본에 종속된 느낌이었다. 길거리 한자들도 일본의 굴림체 둥근 글씨가 많았고, 곳곳의 안내문도 일본어가 많았다.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펄쩍 뛰었다. 화교 출신의 가이드는 대만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두 번째 선진국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재 국민소득이 18,000불이라고 한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환율이 떨어지기 전엔 20,000불이 넘었었는데, 우리나라에 대한 견제심리가 대단한 느낌이었다.

 

승용차들은 대부분 일산이었다. 일제 식민지로 거부감이 있을 터인데, 전혀 없어 보였다. 모처럼 만난 국산 승용차.

 

 길거리 풍경

 

 스쿠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신호 대기 중 엉켜있었다. 자동차보다 스쿠터가 많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길가의 공기가 너무 나빴다. 마구 달려드는 스쿠터 때문에 운전자들이 짜증 날 법도 한데, 경적 하나 울리지 않고 서로서로 잘 피해 달렸다. 가이드 말로는 승용차가 없어서 스쿠터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막히기 때문에 편의상 탄단다.

 

 타이베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지하에 시내 지하철과 시외 기차가 플랫폼을 함께 사용했다.

 

 화련행 기차 09시 출발, 기차 이름은 자강호다. 장개석의 통한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통일호 새마을호 같은 이름, 역시 독재 철권통치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

 

기차 차창 밖 풍경. 타이베이에선 잔뜩 흐렸었는데, 이곳은 화창한 날씨였다. 논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모를 내렸는지 써레질까지 마쳤다.

 

우리가 타고 간 자강호 열차는 1990대 후반 우리나라 현대에서 제작한 것이란다. 열차 안은 비교적 쾌적했다.

 

기차역에서 내려 버스로 바꿔 타고 이동했다.

 

왼쪽으로는 타이완 동해 바다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높은 산맥을 따라 원주민들의 민속 쇼를 관람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미족 민속 쇼장.

 

이곳의 원주민인 아미족 젊은이들이 춤을 추었다. 남자들은 날씬했는데, 여자들은 살이 올랐다. 무희들이 살쪄서 그런지 프로 정신이 부족해 보였다. 그들의 시선 처리도 그렇고... 아마추어 냄새가 너무 많이 났다. 식사 후 관람하는 터라 억지로 구색 맞추기 위한 쇼는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무당이 액을 막는 행위 같다.

 

남녀의 혼인의식이다. 어딜 가나 혼례 의식은 만인의 관심사인 모양이었다.

 

협곡의 절벽 기슭에 세운 장춘사. 타로코 협곡에 길을 내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마치 폭포 위에 사당을 지은 것 같다. 협곡의 길을 만들었던 총책임자는 장개석 총통의 아들이었던 장경국이란다. 그 역시 도로 공사 중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가이드가 전했다.

 

길 닦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사당이 관광지라니,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협곡을 올라 연자구에서 내렸다. 협곡의 벼랑을 깎아 도로를 냈기 때문에 낙석이 많단다.  연자구는 한자로 보아 제비집 구멍이라는 뜻이다. 벼랑 중간중간에 제비집 모양의 구멍이 많았다.  벼랑의 바위들은 모두 대리석이다. 타이완인들은 이 대리석만 팔아도 향후 100년은 살 수 있다고 한다.

 

 연자구를 지나 올라 구곡동에 이르렀다. 굽이굽이 터널과 벼랑 기슭을 깎아 길을 냈다. 낙석의 위험 때문에 관광객들은 안전모를 쓰고 벼랑 쪽에 붙어 관람을 했다.

 

 도로 건설 책임자였던 장경국이 일찍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교량공사 후 정자를 지었단다. 다리 이름도 자모교(慈母橋), 정자 이름은 자모정(慈母亭)! 어머니를 그리는 자식의 정은 동서고금의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동안 태풍 때문에 수없이 무녀 졌었던 다리가 이 다리 이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단다.

 

 협곡의 벼랑길로 버스 한 대가 아슬하게 지나갔다.

 

중간 휴게소

 

타이베이로 가기 위해 화련역으로 돌아왔다. 타이완 시간은 우리보다 1시간 늦다.

 

화련역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소도시의 작은 역 같다.

 

타이베이로 돌아갈 열차는 일본 히타치에서 제작했단다.  3 년 전에 들여온 열차로 코너 웍이 좋아 주행시간을 단축했단다.  90년대 현대 기차와 은근히 비교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신형 열차의 좌석이 더 불편했다.  현대 열차에 있던 발받침도 없었고, 미끄러운 레자 시트 때문에 엉덩이가 아팠다.

 

호텔에서 1박 후, 찾은 곳은 지우펀이라는 옛날의 광산촌이었다. 좁은 계단 길 위로 재래식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198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상을 받았다는 대만 영화 "비정성시"의 배경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드라마에도 소개되어 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계단을 조금 오르니 드라마 "온에어" 주인공들이 차를 마셨다는 카페가 나타났다. 입구에 드라마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같이 갔던 분들이 상당히 좋아했다.

 

옛날 극장터.

 

옛날 광산시절을 기념하여 광부의 모습을 세웠다.

 

지우펀 골목 상가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

 

 전망대 위에 서니 멀리 해안선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언덕 비탈에 들어선 달동네. 자연적으로 계단처럼 바다를 향하고 있어서 전망이 매우 좋을 것 같다.

 

 전망대 오른편 뒤쪽으로 산 위에 죽은 자들의 집이 있었다. 죽은 자들을 위해,  산 위에 작은 집을 지어 무덤으로 삼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사이좋게 가까운 곳에서 이웃하고 있었다.

 

 멀리 해변을 바라보니 경치가 정말 좋았다. 다만, 비 오는 날씨라 시계가 좋지 않아 아쉬웠다.  

 

전망대 주변 안내지도

 

전망대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상가 입구

 

지우펀을 돌아 나와 비 속을 뚫고 예류에 도착했다. 

 

비가 내려 비닐 우비를 하나씩 구입해서 입었다. 카메라를 어찌해야 할지 거추장스러웠다.

 

예류 해상 국립공원은 침식과 풍화로 바닷가에 기암괴석들이 펼쳐진 곳으로 세계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곳이다. 익히 소문은 들어 대략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비와 바람에 세차게 분다고 한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 쪽은 바로 하루 전에 폐쇄했다. 해변으로 돌아서자마자 만난 곳이 폐쇄된 곳으로 포클레인 한 대가 비바람 속에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줌인을 해 보았다. 가운데 사람 모양의 바위를 여왕석이라 부르며, 예류의 상징물로 여긴다. 각도상으로 이곳에서 보는 모습이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개방된 곳의 버섯바위들. 윗부분은 단단한 바위층이고 아래 부분은 부드러운 사 암층이라 절리 틈을 파고든 파도와 풍화에 의해 윗부분은 남고 아래 부분은 깎여나가 버섯 모양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목부분이 잘려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내린다.

 

 

새로운 버섯바위들이 생겨나고 있다.

 

버섯바위 군락

 

암반에 드러난 화석

 

 풍화에 의해 목이 잘려 머리가 떨어진 북쪽의 바위군

 

 차단되어 갈 수 없는 서남쪽이 아쉬워 다시 한번 돌아보며 걸음을 떼었다.

 

예류 해안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 비는 그쳤지만 날씨가 잔뜩 흐렸다. 도로 중앙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횡단보도 보행자 표시등. 아래 녹색 등 표시는 사람이 걷는 동영상으로 나타났다. 잔여 시간이 짧아지면 걸음걸이가 뜀박질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무표정한 청색등과 대조하면,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모처럼 자유 시간에, 지나가던 길가에 장안국민소학교를 들렸다. 수위실에서 중국말을 몰라 한참을 고생하다가 몇 마디 영어로 소통하여 허락을 받고 아주 잠깐 돌아보았다.

 

학교 앞 정원에 있는 국부 쑨원(孫文) 흉상이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남경에 중화민국을 세우는데, 그때가 건국 원년이 된다. 내년이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란다.

 

학교 안 현관의 게시물. 타이완에서는 중화민국 건국 연호를 같이 쓴다. 그러니까 99년은 건국 99년이란 말이다.

 

현관을 지나 건물 뒤로 나가니 넓은 운동장이 나타났다.

 

달리기 트랙도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닥이 타탄 트랙이 아니고 시멘트였다. 아이들 관절에 무리가 갈 건데.... 또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깨질 것도 같다.

 

다시 타이베이 시내.

 

타이완 101 빌딩의 야경이다. 두바이 때문에 며칠 사이 세계 1등 자리를 뺏겼다. 가이드가 매우 애석해했다.

 

101 빌딩 입구 앞에서 101 타워를 바라보았다.

 

5층에 올라 89층 전망대로 올라가는 승강기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101 관경대에 오르는데 1인당 400원이라는 매표소이다. 한화로 약 16000원 정도

 

89층 전망대. 5층에서 89층에 오르는 시간은 약 45초 정도로 쾌속이었다. 사방을 돌아가며 타이베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애석하게도 유리창에 카메라 빛이 반사되어 밖의 야경을 담을 수 없었다.

 

빌딩의 중심을 잡아주는 쇳덩어리 공이다. 너무 크고 웅장해서 한 컷에 들어오지 않았다.

 

91층 야외 전망대에 올랐다.

 

아래를 촬영하고자 했으나 손각대의 한계로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어 희미하게나마 한 컷 담았다.

 

관람을 마치고 101 빌딩 아래로 내려왔다. 타이완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가 아닌가 싶다.

 

공항으로 귀환하는 길인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 대만의 날씨는 변덕이 너무 심해 예측이 어렵단다. 섬나라 대만 여행 4일 중 이틀을 구름과 비로 보냈다가 햇살이 좋은 날 떠난다니 유감스러웠다.

 

 여기선 아파트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나란 거의 대동소이한데... 우리나라 아파트는 겉모양으로 연식을 알 수 있습니다. 아파트도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탓일 터이다. 유행보다 개성 있는 창의적 건물이 좋겠는데.... 이름도 괴상한 조어방식으로 매우 창의적이다. 어느 외국인 강사가 놀랐단다. 학원에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00 빌라에 살며, 00 캐슬에 살고, 00 팰리스에 사니, 재벌 내지 영주, 또는 제왕의 자식들인 줄 알았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우리 한국인의 허영심 내지 허풍은 국제적으로 수준급이다. 과장되지 않은 예쁜 집이름이 그립다.

 

타이베이에서 가까운 도원 국제공항.

 

인천행 12시 10분. 죽치고 앉아 대기해 보지만, 비행기 탈 때마다 너무 지루한 일이다. 2시간 전 도착해서 시간 죽이는 일은 정말 따분할 뿐이다. 게다가 환승이라도 할라치면 아까운 반나절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눈 덮인 나라로 되돌아왔다. 밖의 기온이 영하 13도란다. 집으로 오는 길에 버스 차창이 꽁꽁 얼어 밖의 풍경도 볼 수 없었다.

 

대만은 짧은 역사 때문에 문화유적은 많지 않았다. 대륙에서 밀려난 장제스 정부의 중화민국으로 오늘날엔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다. 우리와 같은 시기 경제개발을 시작했으나 우리와 달리 중소기업진흥에 힘썼다. 그래서 빈부의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다고 들었었는데, 요즈음엔 이곳도 빈부갈등이 사회의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구밀도도 높고, 타이베이의 높은 집값과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서민들은 어렵게 살아간다고 한다.

 

한국을 부러워하면서도 한국을 폄하하는 나라 정도로 대만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고 나서도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 때문에 국가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정쩡한 "차이니스 타이베이", 발전하는 경공업 중심의 경제 국가, 산이 높고 험한 섬나라, IT 산업 부분에선 우리와 경쟁하는 나라라는 인식에서 이제는 비바람이 많은 섬나라, 태풍의 공포로 몸살을 앓는 나라, 문화유산이 부족한 나라라는 인식들이 추가될 것 같다.

 

3박 4일의 여행, 그것도 가이드의 일방적인 설명과 안내대로 움직이는 주마간산의 여행으로 뭘 평가할 수 있을까마는 볼거리가 너무 없었다. 중국에 갔을 때는 옛날의 유물 하나만 보아도 역사와 대륙의 웅장함이 배어 나오는 듯했지만, 대만에서는 그런 역사와 유물들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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