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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남산골 한옥마을

 09년 7월 30일 남산골 한옥마을. 뜨거운 날씨였지만 방문객들이 많았다. 동아시아인들은 외양으론 구별이 안되어 말소리로 알 수 있겠는데, 중국사람들이 많아,  한옥마을이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중요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한옥마을 입구

 

 안내문에는 이곳은 원래 맑은 계곡물이 흘러 푸른 학이 살고 있어 청학동이라 불리던 곳이린다.  이곳에 옛 정취를 살리고자 정자를 짓고 사대부 집과 평민의 집, 모두 다섯 채를 옮겨 한옥마을을 조성했노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역사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에겐 보존된 옛것들이 너무 적다. 이 한옥마을의 첫인상도 박제된 마을 같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한국의 전통미를 찾아보려면 서울은 불가능할 것 같고, 안동이나 가야 살아 숨 쉬는 전통가옥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 과거의 복원된 모습만 볼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어딜 가나 식후경이 제일이다. 고풍스러운 집마당에 간이식당을 차렸다.

 

마당에 선비차림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남산 서울타워만 보이지 않는다면 과거의 한 장면이라 해도 믿겠다.

 

마을 안 광장. 무대가 있고 무대 위에는 혼인날 성장한 신랑 각시의 커다란 인형이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였던 순정왕후 윤씨의 친가란다.  안내문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 집은 왕후가 출가하기 이전에 살던 집으로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것을 1996년 남산골 공원 조성 사업으로 옮긴 것이다.

 

건물 안에 궁중여인들의 빛바랜 사진이 한옥마을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여인들이지만 망국의 비극을 생생히 체험하며 살았기에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진 속을 자세히 보면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함께 섞여 기념 촬영을 한 걸 보면 일제에 대한 별 저항의식 없이 공존하며 살았나 보았다.

 

한옥 마을을 막 나오는데, 오늘 촬영의 절정인가 보다. 계단에 신랑이 서있고 집사와 신랑 친구들은 신랑을 올려다보고 있다. 뒤쪽으로 구경꾼들의 모습이 섞여 있어, 과거와 현재가 어색하게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한옥마을 아래 한식당

 

조선조 정치가들과 왕들이 한심스럽다. 훌륭한 사람보다 대부분이 국민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전투구했었다.  조선조 중반 선조 때 왜적에게 전국토를 유린당하고, 삼십몇 년 후, 인조 때에 업신여겼던 오랑캐들에게 또 전국토를 내주고, 삼전도에서 임금이 적장에게 고두구배의 예로써 항복하는 굴욕을 보였다. 조정의 각료들은 아래로 백성들에겐 가혹하게 가렴주구하고 위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 결과, 그로부터 이백여 년 후, 1910년에는 왜적에게 싸움 한 번 못하고 백성들과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내년이 바로 그 100년 되는 해이다. 후손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왜 후손들이 수치스러운 역사를 물려받고,  왜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할까.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과거의 재탕 같아 씁쓸하다. 진정으로 나를 던져 조국과 백성을 위하는 큰 인물은 없을까. 백성들이 깨어야 할 텐데... 옛날과 달리 백성들이 정치가를 만드는 세상이니까, 백성들은 가증스러운 소인배를 가려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하겠다. 결국 정치판이 혼탁하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 백성들의 책임이다.  일제에 아부하던 자들의 후손들이 반성과 사죄의 뉘우침도 없이 일제 때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 우리나라 곳곳에 지도층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도 극복해야 할 우리 백성들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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