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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고양이, 렉돌

 고양이라면 질색이었다. 어려서 키우던 고양이를 안았다가 왼쪽 팔에 심한 할큄을 당하고 나서 고양이는 트라우마의 대상이었다. 그 후로는 고양이에게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과거 군부대에선 고양이는 필수 군수품으로, 군량을 훔쳐먹는 쥐를 잡는 은밀하고 뛰어난 병사였다. 그런 탓에 겨울이면 취사반 아궁이 옆에서 잠을 자는 특권도 누릴 수 있었고, 달 밝은 밤에는 탈영하여 갓난애 울음 같은, 짝을 부르는 구애의 소리로 부대 주변 산속을 헤집어도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밤을 지키는 초병에게 고양이 울음소리는 음산한 귀곡성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들고양이들이 가까이 어술렁거리면 발을 굴러 멀리 내쫓곤 했다. 우리나라 들고양이들은 사람들을 몹시 경계한다. 길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면서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다. 예전에 터어키에 갔을 때, 공원 벤치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었다. 우리나라 고양이들과 전혀 다르게 여유롭게 사는 그 나라 고양이들의 습성에 고양이들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졌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경계하는 동물이 아니라 보살핌의 대상이었나 보았다. 길거리를 유유자적하는 덩치 큰 개들도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순둥이들이었다.   

 문학에서나 영화에서도 고양이는 범상치 않은 영물로 등장한다. 포우의 '검정고양이'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옛날 007 영화 속의 고양이는 빌런 수괴가 아끼는 애완묘로 종종 등장한다.  

 객지에 혼자 사는 아들이 파란 눈의 새끼 고양이를 모셔왔다. 알레르기가 심한 나는 몹시 못마땅했지만 객수를 달래려 들여온 고양이라는데 내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집에 방문했을 때 주인이 출근한 뒤 고양이와 둘이 거실에 맞닥친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낯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얄미웠다. 고양이와 눈싸움을 해봤지만 먼저 피하는 것은 언제나 끈기 없는 나였다. 먹이도 주고 물도 갈아준 덕분인지 하루가 지나자 고양이의 낯가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고양이를 얼레서 미간을 쓰다듬어 보았으나 일 분여를 참지 못하고 뿌리치며 곁에서 떨어져 갔다. 그리곤 가까운 거리에서 엎드린 채 빤히 쳐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 녀석은 일반적인 고양이의 파충류 눈동자처럼 징그럽지 않아서 귀여운 모습이었다. 멀리서 보면 얼굴의 털무늬 때문에 너구리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가까이 보면 파란 눈이 매혹적이었다.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고 놀아주며 며칠이 지나자 녀석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는 것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기분이 좋아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달려들어 내 손과 발을 사냥감 삼아 깨물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좋아서 장난치는 거라는데, 장난감이 되어 놀아주기엔 너무 아팠다. 내 다리와 팔에 물리고 할쿼진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궁여지책으로 고양이가 달려들기 시작하면 진공청소기를 돌리곤 했다. 청소기 소리가 무서워 멀리 도망가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의 고양이, 미국에서 개량한 품종 '렉돌'이다. 덩치가 커서 비만 고양이에 속하지만 성품이 유순하고 친화적이란다. 집에 들여온 녀석은 어린 탓인지 생기 발랄했다. 조석으로 까불고 사냥하듯 숨었다가 뛰어나와 장난감을 공격한다. 사냥본능이 뛰어나지만 호기심 많고  천진난만하다. 아직 한 번도 야옹하는 울음소리를 낸 적이 없다, 핸드폰으로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를 여러 번 들려줬는데, 관심이 대단했다. 자주 들려주면 야옹거릴까봐 그만 두었다. 시력은 좋지 않은 듯, 정지된 먹잇감은 잘 찾지 못하지만 동체 시각과 청각은 매우 예민하게 발달했다. 점프력도 좋고 대단한 몸놀림으로 거실을 제 영역으로 인식하고 좁다는 듯 뛰어다닌다. 한낮에는 어두운 구석을 찾아 숨어서 오붓하게 낮잠을 자며 제 방식의 삶을 즐기고 있다.  

 어쩌다 어미가 그리운지 내 곁에 붙어 속옷을 물고 젖 빨듯 가르랑 거리며 한참을 빨아대곤 했다. 그 모습이 가여웠다. 업자들의 장삿속에 일찍 어미와 떨어져 어미를 찾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고양이 침이 흠뻑 묻은 속옷을 세탁기에 넣으며, 어미 노릇을 계속해주어야 할지 고민해 보았다. 가엽긴 하지만 좋은 버릇은 아닌 것 같다. 고양이가 거리를 두고 따르듯 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예쁘다고 가까이 놀아주다간 내 손발이 성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모시고 사는 느낌이다. 내가 들여온 고양이가 아니라 아들의 선택인 만큼 그만큼 존중해 주려니 내 머리가 혼란스럽다. 고양이 주인을 집사라 부르는 것이 이해될 성싶다. 조석으로 모래 속의 똥오줌 치워고 끊임없이 장난감과 간식거리를 사들이며 고양이 수발에 힘쓰는 노력이 안쓰럽다. 사람이 고양이 수족이 되어 오히려 모시고 사는 것 같은 착각에 고양이와 함께하는 생활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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