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는 조선 왕조의 다섯 능으로,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말한다. 이외에도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과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수경원,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묘역이 크게 둘로 나뉘어 숙종대왕의 명릉은 매표소 맞은 편에 뚝 떨어져 있고, 명릉을 돌아 나와서 다시 입장하는 불편이 있었다. 주차장이 비좁아 휴일이나, 공휴일에는 차량주차가 어려울 것 같다. 주변에 주차장을 갖춘 식당들이 많아, 식당주차장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명릉은 서오릉을 대표할 수 있는 숙종대왕의 능인데, 서오릉은 숙종과 관련된 여인들이 숙빈 최씨를 빼고 모두 있는 곳이었다. 숙종과 인현왕후, 또 그 계비 인원왕후의 능이 있고, 숙종이 어려서 장가든 첫째 부인 즉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이 있으며, 악녀의 대표격인 장희빈의 대빈묘까지 있다. 고맙게도 명릉은 관람객들을 위해 봉분 위까지 개방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심스럽게 능침 주변까지 다가가 이모저모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명릉은 조선 제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이다. 숙종대왕과 인현왕후를 모신 곳이다. 파주 광탄에 있다는 드라마 "동이" 로 잘 알려진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를 모신, 소령원과 함께 탐방하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소령원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보는 방향으로 정자각 뒤, 오른쪽으로는 능침 두 개의 숙종과 인현왕후의 합장묘가 있고, 조금 사이를 두고 뒤편 왼쪽으로 인원왕후의 독립 능침이 있다.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비
숙종대왕 묘 앞의 무인석
인현왕후 능침 앞의 무인석
보는 방향으로 왼쪽이 숙종대왕, 오른쪽이 인현왕후의 능침이다. 두루 아는 것처럼 인현왕후(1667-1701)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계비로 간택되었다. 그 후, 당쟁과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위되어 폐서인으로 민가로 쫓겨나 살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 되었으나 지병으로 소생 없이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뒷면
숙종 능에서 왼쪽 뒤편으로 조금 떨어진 인현왕후의 뒤를 이은 인원왕후의 능이다.
인원왕후(1687-1757)의 아버지는 노론 집안의 경은부원군 김주신으로, 인현왕후가 사망한 다음해인 1702년(숙종 28년) 10월 13일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당시 숙종의 나이 42세, 인원왕후의 나이 16세였고, 최숙빈의 나이 33세였다. 숙종의 이전 왕후들인 인경왕후나 인현왕후는 모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가 간택하였으나, 인원왕후를 간택할 때에는 궁궐에 웃어른이 없어 숙종이 직접 간택하였다. 16년 후인 1718년 최숙빈은 49세의 나이로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들의 사저인 창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숙종을 모시고 18년을 살았는데, 슬하에 소생이 없었다. 1720년 34세에 숙종이 춘추 60세로 승하하자 경종을 등극시키는 교지를 내리고 대비가 되었는데, 인원왕후의 집안이 서인 노론집안이다 보니 남인계열인 경종보다는 숙빈의 아들인 연잉군에게 더 정을 주었단다.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인원왕후의 결정적인 도움 때문이고... 38세 때 1724년 경종이 승하하고 왕세제 연잉군이 등극하자 인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원왕후는 장수하면서 영조의 효도를 받다가, 영조 33년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인원왕후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승하 후, 33년 간 10여 차례에 걸쳐 존호를 올려 대왕대비를 존숭하였다.
인원왕후 무인석의 얼굴은 잔뜩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망주석 조형물... 다람쥐가 거꾸로 기둥에 붙어 있다.
인원왕후 능침 우측면에서 바라본 명릉 일대. 무인석 뒤로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능침이 보인다.
서오릉 안내도
서오릉은 둘로 나뉘어 출입구로 들어가서 4 릉을 한 바퀴 돌아 나와, 다시 반대편 입구로 가서 명릉을 관람해야 한다. 충분한 설명과 안내가 미흡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의 배려가 필요할 듯하다. 주변에 난립한 식당들도 문제이고, 좁디좁은 주차장 하나로 그 많은 관람객들을 수용하기 불가능해 보였다. 때마침 주변에 주차했던 많은 차량들 유리창에 주차단속요원들이 희희낙락하며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대책도 없이 단속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텐데...
우리나라의 주먹구구식의 탁상행정을 보는 것 같아 마치 내가 딱지를 끊긴 것처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