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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

삼각산 길상사

  시궁창에서 연꽃이 피는 것처럼, 독재정치의 어둠 속에서 독버섯처럼 피었던 고급요정이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채, 이제는 도심 속에서 중생들의 離苦得樂을 위해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의 사랑을 펼치고 있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조선 권번에 들어가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그 때,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이던 네 살 위의 청년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이때 백석은 김영한이 읽고 있던 <당시선집>에 나오는 '子夜吳歌'를 따서 '子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전쟁 중, 1951년 김영한은 일제 때 별장으로 쓰던 '청암장'을 인수하여 '대원각'이라는 고급요정을 차렸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하기도 했다. 남북 분단으로 백석을 만날 수 없었던 김영한은 백석을 사랑하는 마음에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면 하루동안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88 올림픽이 냉전시대의 갈등을 극복하고 성황리에 끝나면서, 정지용, 백석 등 월북시인들의 작품들이 해금되자,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였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또, 1997년엔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의 시적 업적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1987년 법정스님을 만나고서, 스님에게 전재산을 시주하고자 하였으나, 법정스님의 만류로 늦춰지다 1995년에야 대원각을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받아들였다가, 1997년 김영한의 법명인 길상화를 절이름으로 송광사 서울분원인 오늘의 길상사가 되었다고 한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14일 타계하였다.

  길상사 일주문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


들어서자마자, 보는 방향으로 왼 쪽이 극락전, 오른쪽이 설법전이다.

 

극락전 계단 아래에서

 

대문에서 우측으로 돌아 길상사아래 끝지점에서 위로 올려본 정경

 

설법전 끝 지점에서 바라 본 범종각과 극락전

 

설법전 남쪽 방향, 수려한 성북동 산세 속에 고급 주택지역이다.

 

설법전 앞의 성모 마리아를 닮으신 관세음보살님 - 천주교 신자 조각가가 다듬은 것으로 종교 간의 화해의 염원을 담은 부처님이란다.

 

본당 격인 극락전

 

극락전과 범종각

 

우측부터 법고, 목어, 극락전

 

극락전 안의 삼존불- 가운데 아미타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 좌우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이다.

 

극락전 안 좌측에 모셔진 법정스님

 

경내, 곳곳에 걸려있는 법정 스님의 경구

 

길상헌- 골짜기를 건너 담으로 둘러싸인 안채로 살림집 모양이었다. 독립적인 공간으로 장독대도 갖춰있고...

 

길상헌 뒤 언덕에 있는 '길상화' 김영한의 공덕비

 

공덕비의 뒷면

 

뒤에서 본 길상헌과 극락전 주변

 

 

 

길상선원 -일반 불자들을 위한 상설시민선방

 

월조헌 등으로 스님들의 처소

 

청향당

 

행지실

 

행지실에서 바라본 전경

 

지장전과 선열당(맨 아래층으로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공양하는 곳)

 

지장전 앞에서 바라본 길상사 정문

 

지장전과 그 주변

 

때마침 지장전으로부터 스님들과 많은 사람들이 합장하며 나왔다. 아마도 제를 올리는 듯...

 

 

 

 

 

 

 

 

 

지장전 뒤에 있는 주차장

 

수려한 풍광 속에 서려있는 김영한 보살의 이야기가 너무나 슬프고도 애절해서 가슴을 울린다. 그의 삶은 진실로 한 떨기 연꽃 같다고 하겠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을 생각해서 백석이 지었다는 戀愛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기생과 사랑에 빠진 백석을 그의 집에서 곱게 봐줄 리가 없었겠다. 그러니까 결국, 백석이 꿈꾸는 사랑의 세계는 현실밖의 세계인 깊은 산골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외딴섬이거나... 현실적으로는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해외가 사랑의 도피처가 될 수 있었겠다. 당나귀는 그들만의 세계로 이어 줄 매개체이다. 사랑은 눈처럼 쌓여가는데, 그들만의 세계로 인도해 줄 당나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타샤도 백석을 따르지 않았고... 현실에서 백석은 만주행을 제의했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았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가 얼마 뒤 함흥으로 되돌아왔지만 남북이 분단되어 오가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만날 수도 없는 현실 속에서 여인은 가슴속에 백석을 평생토록 묻고 살았다. 만날 수 없어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가 결국, 무소유의 이치에 크게 공감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고......

 

길상사 길상화 - http://www.gilsangsa.or.kr/frame.asp?N_M=comp&N_F=comp&N_L=comp&N_T=comp_03&N_P=comp_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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