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 후 곧장 하롱베이 선착장으로 갔다. 물을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인자는 요산요수라 했으니 물을 벗 삼아 지내는 것이 사람의 심성을 너그럽게 하나 보다. 이곳은 물 좋고 아름다운 기암괴석들로 가득하니 금상첨화라 하겠다.
선착장 대합실을 빠져나가 계단으로 내려가 대기하고 있는 유람선에 올랐다. 오늘은 이 배에서 하루종일 선상유람할 예정이다.
비슷 비숫하게 생긴 수많은 유람선들이 즐비하다. 그 사이로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바다로 나갔다. 바다라고 하지만, 잔잔한 물결이 호수 같다. 이 넓은 바다 호수에 기암괴석으로 된 무인도가 수천이란다. 참으로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이라 하겠다.
유람선은 목선으로 2 층 구조였는데 아래층은 식당으로 꾸며졌고, 2층은 갑판으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층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간다.
멀리 보이는 섬은 메이저 리거 박찬호가 조성하는 리조트란다. 많은 돈을 주고 50년간 임대하여 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라 토지는 매매가 되지 않으니 50년을 임차했는데, 그 세월이면 원하는 것 이상 큰돈을 벌 수 있단다. 박찬호의 재력이 이곳까지 떨친다니 대단해 보였지만 가이드 말은 언제나 믿거나 말거나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석회암 동굴이었다.
동굴 유람을 마치고 다시 배에 올라 갑판에서 스치는 유람객을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우리 일행을 보고 활짝 웃어 주었다. 옷차림만큼이나 시원한 미소였다.
바다 한가운데 양식장에 내려 그 유명하다는 다금바리를 보았다. 국내에선 구경조차 어렵다는 다금바리가 이곳엔 지천인가 보다. 물이 맑아 보이지 않아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그 비싼 다금바린데, 곧 회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양식장 주인과 가이드의 흥정 끝에 두 마리가 올라왔다. 솔직히 회 맛은 그저 그게 그거던데... 귀한 것이라니 일단 기대되었다. 여행사에서 다금바리라고 하는 이 물고기는 능성어다. 어시장 상인들도 이 능성어를 다금바리로 속여 팔기도 한다.
바다 가운데 수산 시장
양식장 옆에 작은 보트를 대고 젊은 아낙이 아이와 함께 행상을 하고 있었다. 젊어서 그런지 가난에 쩌들어 보이진 않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저토록 빈부의 차이가 난다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작은 보트를 타고 행상하는 어린아이들은 유람선에 원숭이처럼 붙어서 작은 고사리 손에 지 몸체만 한 바나나를 들고 행상을 했다. 해맑은 눈동자로 빤히 처다 보면서 물건을 사라는데, 참 난감했다. 우리 어렸을 때 미군을 따라다니며, "헬로! 짭짭 기브미!" 외쳤던 기억이 갑자기 상기되어 낯이 뜨거워졌다. 곁에 있던 우리 아들에게 말했더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먹고살자는데, 뭐 부끄러운 거 있을까.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본능적 투쟁일 텐데... 좀 있다고 뻐기는 자, 부디 역지사지했으면 좋겠다. 사람의 자취 하나 없는 고도에 혼자 외롭게 서 있다면 그는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양식장인지 어판장인지를 떠나 유람선은 다시 하룡만을 떠돈다.
가도 가도 기이한 섬들은 끝이 없다. 몇 천 개의 무인도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해금강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 같다.
드디어 다금바리라고 사기 치는 능성어 회가 나왔는데, 실망스럽다. 네 명이 저 한 접시를 먹는데, 1인당 30 불씩이니까, 저게 120불짜리다. 알면서도 속고 먹는 능성어회, 속으며 먹는 사람이 나쁜 건지 속이는 여행사와 가이드가 도둑놈인지, 웃기는 세상이다. 얼른 다가앉아 초고추장 찍어 한 점 먹어 보는데 역시 그저 거기서 거기다. 저 접시도 얼음 깔고 그 위에 비닐을 덮고, 거기에 얇게 썬 생선을 얹었다. 몇 번의 젓가락 행보에 곧 바닥났다.
능성어 외에 이것저것 잡다한 해물을 먹다 보니 포만감이 들었다. 갑판에 오르니 하롱베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는 티톱섬이 나타난다. 구소련 우주비행사를 기념한 이름이라나 뭐라나. 가이드의 설명을 대충 흘려 들었다.
가이드 꾐에 빠져 스케줄에 없는 옵션놀이로 작은 모터보트를 타고 007 영화를 찍었다는 장소를 관람했다.
영화 속에서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작은 터널을 통해 섬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인 섬 안의 바다 호수로 나갔다. 유일한 출입구는 이 동굴 터널 한 곳밖에 없다.
큰 감동은 없었지만 모터보트의 쾌속에 바닷바람이 참 시원했다.
모터보트는 우리를 티톱섬에 내려 주었다.
티톱 섬 전망대에 올랐다. 잔잔한 물결 위를 작은 보트가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파도를 가른다. '정중동'이란 말이 이런가 보다. 그림 같은 이 풍경을 액자에 담아 집안에 걸고 싶어졌다.
섬 아래 바닷물에서 중국인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풍덩 뛰어들고 싶었다.
내려오는 길에 고즈넉한 전경을 아쉬운 마음으로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배는 선착장으로 향하고, 섬들을 뒤로하며 떠나간다. 경이롭던 섬들도 이젠 무덤덤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섬들을 떠나보냈다.
'인도차이나'라는 영화를 하롱베이 이곳에서 찍었단다. 오래전에 영화 포스터는 본 것 같은데... 귀국하면 꼭 봐야 하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하롱베이를 떠났다. 날씨는 매우 좋았다. 이제 3시간 정도를 차창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볼 것이다. 저 멀리 하롱베이의 기암들이 보였다. 빈자리가 많아 이쪽저쪽 자리를 옮기면서 구경을 했다.
창밖으로 상여가 지나갔는데, 수레를 이용한 꽃상여였다.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유력자인지도 모르겠다. 이승을 하직하는 길에 마지막 치장을 한 모습이 옛날 우리나라 꽃상여와 비슷해 보였다.
자전거, 또는 오토바이를 끌고 상여 뒤를 따라간다. 스쳐 지나는 모습에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들녘에는 안남미가 푸르게 자라고 그 뒤로 민가가 형성되었는데, 앞에서 보는 경관이 아주 좋았다. 우리나라 농촌 풍경보다 나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집 모양새가 모두 대동소이하다. 길게 직사각형으로 2층 또는 3층을 올렸는데, 그 규격이 자로 잰 듯, 같아 보였다. 까닭을 물으니 월남전 때, 미군의 폭격 피해가 하도 커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당국에서 저렇게 짓도록 규제했단다. 폭격 맞아 집이 무너져도 여러 집들이 연쇄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폭격 맞은 그 집만 상하도록 했다는 거였다. 또 다른 풍경은 건물의 정면은 화려하게 치장을 했는데 측면은 시멘트 벽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유가 생기면 그 벽을 이용해 증축하기 때문이란다. 알고 보니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제는 전쟁이 끝났기에 괜찮을 것 같은데, 어쩌면 생활의 관습으로 굳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노이 시가의 광고판인데, 여기서는 장동건이 최고의 인기 배우란다.
옛 월맹의 지도자 호찌민의 영묘이다. 성역화된 경내에서는 옷도 함부로 입지 못하는데, 민소매 옷은 절대불가다. 관리들이 사방에서 관람객들을 지도했다. 저 뒤의 건물에 호찌민은 잠자는 듯 유리관 속에서 영면하고 있다. 돌로 만든 석상이 아닌, 살아있는 수십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며 베트남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신화였다. 끝없는 자신에 대한 절제와 조국과 국민을 위한 일념으로 베트남을 해방시키고 통일했다. 결혼하면 처자식 생각에 나라 생각하는 마음에 누를 끼칠까 봐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민중을 이끌었단다.
정말 아름다운 지도자라 생각했다. 사리사욕에, 자신의 쾌락과 자식들의 영달을 위해 백성들을 억누르며 뒷구멍으로 딴짓하던 우리나라 각하들을 생각해 보았다. 왜 저런 인물이 없는 것일까. 백성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생각해 보았다.
1906년 지어졌다는 화려한 베트남 총독 관저다. 호찌민은 이 집을 거부하고 작은 집에서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지금은 국빈들을 맞는 곳으로 사용된다는데, 장동건이 초대되었단다.
위의 대통령궁을 지나 정원 속에서 연리지를 만났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한 가지로 붙어 버렸다. 연리지를 실제로 본 건 여기가 처음이다. 지순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 연려지를 보면 운수가 대통한다고 한다.
과거 호찌민 집무실,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호찌민의 침실
호찌민이 기거하던 집. 위의 집무실은 저 집의 2층에 있다. 웅장한 건물에 지도자가 살아야 정치가 잘 되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만...
아! 이건 참! 귀한 집 자식들이다. 보모들의 섬김을 받으며 단체로 나왔다. 빨간 나라에서 유람선에 달라붙어 바나나 팔던 어둠의 자식들은 뭐고, 기름기 줄줄 흐르는, 이 귀티 나는 얘들은 또 뭐냐. 또, 조국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호찌민의 지도력은 또 어디 갔다냐.
어지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영묘를 나왔더니 눈에 익은 차종이 앞에 서는데, 놀랍게도 택시였다. 우리도 경차 택시 만든다더니 베트남에서 배웠나 보다.
이번엔 흰색 마티즈 택시였는데, 베트남에는 대우 차가 꽤 많았다. 대우가 망하기 전 김우중 대우 총수가 베트남 교육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엄청나게 지원했단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김우중 전대우 총수를 무지하게 존경한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 기업으로 재계 랭킹 수위였는데, 지금은 옥에서 나왔나 모르겠다.
패키지여행의 필수 코스. 라텍스 상점에 갔다. 살 것도 아닌데, 구경할 것도 아니고 해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라텍스 매트리스 위에 아들과 같이 정말로 누워서 잠시 피로를 풀었다. 이럴 때 가이드들이 눈총 주던데, 가이드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롱베이에서 오는 길에 무슨 웅담 연구 소라는데서 살아 있는 곰에 주사기를 꽂아서 쓸개즙을 빼내어 팔았다. 무슨 박사라는 한국 놈이 외면하는 사람들을 눈을 부라리며 똑바로 보라고 겁박했다. 10cc짜리 유리관에 담긴 웅담은 개당 80만 원이라는데, 동행한 아줌마 일행이 수백만 원어치 웅담을 싹쓸이해 버렸다. 그래서 가이드 입이 귀에 걸렸다. 50여만 원짜리 패키지여행 와서 수십만 원짜리 상품들을 사가는 여행객들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 덕에 기분 좋아진 가이드가 살갑게 안내해서 편하긴 했지만... 이 아줌마들은 캄보디아에 가서 상황버섯을 싹쓸이하다시피 보따리에 담았다.
점심 먹으러 간 한식당
점심 먹은 후, 요란한 빗소리에 2 층 식당에서 밖을 바라보니, 스콜이 내렸다. 거센 빗줄기가 사정없이 떨어졌다.
비가 그쳤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러 식당문을 나섰다.
이동하는 길에 차창 밖 광경에 놀랐다. 시내 한 복판에 미그기들이 있었다. 공군 비행장은 아니겠고, 아마도 전쟁 기념관쯤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았다.
씨클로 체험 중, 자전거가 낡았다.
씨클로 옆에 붙어 뛰어가는 어린 소녀는 부채를 강매하기 위해 끈질기게 떼쓰는 중이다. 앞에 탔던 아들 녀석은 결국 2000원에 작은 쥘부채를 사고 말았단다.
좁은 차도에 차들이 달려가고, 그 옆엔 오토바이들이 거침없이 달리고, 그 옆엔 낡은 씨클로가 관광객을 태우고 눈치껏 달린다. 또 그 옆에 두 발로 걷는 시민들이 노점상과 흥정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스콜이 내린 뒤라 보도에 물기가 흥건하다. 하노이 시내에는 이처럼 예쁜 호수들이 많았다.
씨클로 주행 중에 스친 이방인! 남자는 목발을 지니고 있는데, 남녀 두 사람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체중이 많이 나갈 것 같은데, 그 뒤 씨클로 주인이 꽤나 힘들 것 같다. 저럴 땐 두 배로 받아야 될 것 같다.
고풍스러운 분수 곁도 스쳐 지나갔다.
이제 하노이를 떠나간다. 공항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전쟁의 흔적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마간산이라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도시민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하노이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했다. 자세히 보니 공군과 함께 비행장을 쓰는 모양이었다. 보안 때문인지 공항 청사에서 밖을 전혀 볼 수 없도록 유리창마다 차단막을 설치해 놓았다.
거지가 없고(빨간 나라이기 때문에), 남자 노인이 없다(전쟁 때문에)는 베트남, 사회적 갈등이 많아 보이지만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고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좋은 기후와 천혜의 조건들을 갖춘 자연, 거기에 무궁한 지하자원까지... 그들의 미래에 큰 축복이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불과 30여 년 전 만해도 뭐 볼 꺼 있었을까마는. 동남 아시안들을 제발 업신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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