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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진도 대몽항전 유적지

 팽목항을 가던 도중 이정표를 보고 따라간 곳은 굴포의 배중손 장군의 사당이었다. 배중손 장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려 무인 정권 말기의 장수로 몽고 침략 시 삼별초로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이곳 진도에서 대몽항전을 벌였다. 제주도를 배후 기지로 확보하여 왜와 연합하여 항전하였으나, 끝내 몽고 진압군에게 진도가 함락되어 삼별초, 배중손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1. 배중손 사당

 

 

2. 남도석성

  고려 원종(元宗) 때 배중손(裵仲孫)이 진도에 와서 1270∼1273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둠으로써,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尺),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 경에는 석축(石築)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

 

 

 복원한 성의 지휘부 건물인 듯한 한옥 건물인데,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안내문도 없고, 회칠한 흙벽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으며, 건물 앞마당엔 경운기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배중손 사당은 굴포항 길목에 앉아있었고, 남도 석성은 굴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면적 약 22,000㎡로 보수하다 그만둔 흔적이 역력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섬안의 사람들은 성벽을 담으로까지 사용되고 있어서 방치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성의 외곽과 내부의 건물은 깨끗이 정비되었으나, 사후 관리는 되지 않았다. 곳곳에 경운기와 트랙터, 승용차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었다. 성안 사람들의 주택은  대부분이 스레트 지붕이어서 발암물질을 지붕을 덮고 사는 격이었다.  낙후된 섬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3. 팽목항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섬의 서남쪽 끝에 있는 연안 항이다. 과거에는 목포-팽목-제주도를 잇는 항구였으며, 현재는 진도 근해의 섬, 그중에서도 특히 팽목과 조도를 연결하는 항로의 출발지가 되고 있다. 팽목항에는 피서객들의 차량들이 항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박 2일에 소개되었던 관매도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간다.

 

  팽목항에 이웃한 서망항에서 때늦은 아침을 먹었다. 새로 지은 식당에서 조반을 청했는데, 대뜸 안주인은 몇 사람이냐고 퉁명스레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면 밥도 못 사 먹겠다 싶다. 세 명이라니까 된장국 백반은 차릴 수 있다는데, 역시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고파서, 정말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7000원짜리 된장국을 먹었다. 그녀는 옆에 앉았던 젊은 손님에겐 밥도 더 주고 국도 더 주며 온갖 친절을 다 베풀던데...

 자연은 아름답되 사람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아서, 멀리 서남쪽 끝까지 찾아든 여행의 기억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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