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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진주성

 비는 멎었으나,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 내릴 것만 같았다. 북상 중 서진주 IC로 빠져, 진주성을 경유지로 삼아 이 고장에 들렸다. 이곳 역시 임진왜란과 뗄 수 없는 고장이다. 진주 시내는 의외로 깔끔했다. 높지 않은 건축물들로 잘 정돈된 시가가 매우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진주성 방문은 이 번이 두 번째, 그 사이가 20년이 넘었나 보다.

 

촉석루 아래 논개 바위인 의암 위에서 서남방향의 남강을 바라 보았다.

 

진주성의 주출입문인 공북문

 

김시민 장군 동상- 이 분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김시민 장군은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 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 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인 촉석루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전한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다음백과>

 

촉석루에서 논개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논개 사당인 의기사

 

논개 영정

 

  충남대학교 회화과 윤여환(56) 교수가 제작한 논개 영정이다. 2008년 2월 9일 최근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통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윤 교수의 논개영정 얼굴은 신안 주씨(新安 朱氏) 용모의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됐는데 윤 교수는 논개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얼굴 연구소에 의뢰, 논개의 생장지역인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지역의 신안 주씨 여성을 촬영한 뒤 150여 군데의 얼굴을 계측 분석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습을 찾아냈다고 한다.

  영정의 논개는 '넓고 네모 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의 '진수아미' 미용법을 하고 있는데 윤 교수는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과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 전기 하연부인상, 운낭자상 등 조선 여인들의 얼굴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아 이 미용법을 따랐다.

  머리 모양은 1997년 11월 경기도 양평의 변 수(邊 脩. 1447-1524) 묘에서 출토된 목각인형 주악상의 머리 모양과 1550년께 제작된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 보물 제870호), 관련 서적 등을 참조하여 재현했다.

  복식(服飾)은 동시대인의 묘에서 출토된 당시 의상과 출토 목각 인형, 당시에 제작된 그림을 참고로 고전복식전문연구소에 제작 의뢰해 3차례의 의상 제작과 가체머리 고증 등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 결정됐다.

  또 의상 문양은 당시 유행하던 문양인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인데 안동 김씨 묘(1560년대)와 변 수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참조하여 제작됐다.

  영정의 논개는 "왜장을 유인해 열 손가락에 힘을 다해 껴안고 함께 강에 투신했다"는 내용의 여러 고문헌 기록들에 맞도록 손가락마다 옥가락지를 끼고 있으며 의기에 찬 표정으로 투신순국을 위해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향해 가려고 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영정은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됐는데 비단(畵絹)이라는 독특한 재질을 살려내는 배채법(背彩法)과 육리문법(肉理紋法)등을 활용해 얼굴 표정에서 배어 나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와 부드러운 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2006년 1월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은 논개의 고귀한 얼을 더 높이 선양하기 위해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를 전국에 현상 공모했으며 같은 해 7월 13일 윤 교수를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로 선정했다. <2008. 2. 8 연합 뉴스 기사문>

  이로써 친일파였던 김은호의 이전 논개 영정은 윤여환 교수의 영정으로 교체되었다.

 

  촉석루 뒤에 있는 작고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었다는 의암이 있다. 이 의암에 논개의 충절을 기린 의암사적비각이다.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의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의해 전해진 기록을 명암 정식(1683∼1746)이 찬한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진주 시민들이 세웠고 영조 16년(1741)에 경상도 우병사 남덕하(1688∼1742)가 비각을 짓고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의암에서 바라본 남강의 동북쪽 방면과 진주교

 

순의단 계단으로 오르며 바라본 촉석루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으로 임진년(1592년) 3 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년)에 순국하신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에 국난 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 경상도 감영의 정문인 영남포정사이다. 오른편에 수령이하는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있다.

 

하공진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경절사(擎節祠)이다.

 

  하공진 선생은 1009년 목종 12년 중랑장의 신분으로 강조의 정변에 참가하여,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랑중이 되었다. 요나라(거란)이 쳐들어오자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서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함께 거란에 스스로 볼모로 잡혀가 요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나, 여러 차례 탈출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연경으로 이송되어 양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살았다. 하공진은 평소 저잣거리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거란왕의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1011년 거란왕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거란왕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음백과>

 

 

진주박물관

 

  양산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으로 1979년 5월 양산시 유산동에서 발굴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인간의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불상으로 재현한 것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도금 부분은 모두 벗겨지고 푸른 녹으로 덮여 있다.

 

진주성 북쪽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북장대. 서쪽 남강가에는 서장대가 있다.

 

 

진주성의 역사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居列城),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 고려시대에는 촉석성(矗石城),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晋州城)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리었다.
고려말 빈번한 해구(海寇)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시 토성이던 것을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1537∼1615)는 왜변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에는 마침내 왜적(倭賊)의 침략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고, 이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2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을 이룩하였다.
동 26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여 명이 또 침략하여, 제2차 진주성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였다.
동 37년(1604)에는 우병사 이수일(李守一:1554∼1632)이 합포(合浦: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와서 이래로 경상도 우병영이 있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촉석루·북장대·서장대·동장대 등을 중건하였다.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이 있었고,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1969년부터는 제1차 진주성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1972년에는 촉석문을 준공하였고, 1975년에는 성곽보수를 완료하였다. 1979년에는 제2차 사업으로, 민가 751동의 철거를 추진하여, 1984년에 마무리하였고, 1992년부터는 제3차 사업으로 성 외곽을 정비하였다.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 계사 순의 단·창렬사·호국사 등이 있다.
하륜(河崙:1347∼1416)의 [촉석성문기]가 있다. <진주시 홈페이지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기 논개의 애국심과 진주 백성들과 김시민 장군의 충절이 서린 곳이다. 깨끗하게 조성된 진주성 안에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유적들을 바라보며 한 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주 시민들이야 한가한 여유를 즐기는 산책 코스로 안성맞춤이겠지만, 외지에서 들린 우리네 나그네들이야 삼가 모골이 송연하여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비록 논개의 이야기가 정사의 기록이 아니라 유몽인의 어우야담 속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선인들의 애국정신이 서린 진주성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아름다운 호국성지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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