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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안스러운 서삼릉

 고양시 원당에 있는 서삼릉, 3 릉 중 중종의 아들 인종의 능인 효릉은 개방하지 않았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철종의 능인 예릉만 개방하고 있었다. 서삼릉으로 가는 길목에 농협대학이 있고, 서삼릉 주변엔 경마 교육원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았다. 능안에서는 방문객들이 그늘 아래돗자리를 깔고 쉬거나,  MT 나온 젊은이들이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여유로운 풍경으로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 단위의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소풍장소로 좋을 듯했다. 희릉과 예릉 만을 개방했기 때문에 산책 코스가 짧고 볼거리가 많지 않다. 애초에 넓은 권역임에고 불구하고 개방된 곳이 적어 안타깝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조선왕조의 능역으로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매우 아쉽다.

 

 

 

희릉-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예릉 :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서삼릉 입구

 

 

서삼릉 앞의 초지, 인근에 경마교육원이 있어, 왕릉 권역으로 문제가 크다.

 

 사적 제200호.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 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⑴ 효릉 : 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했는데, 유언으로 아버지 곁에 묻히길 원하여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곁에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계모인 문정왕후가 아버지 중종의 능만을 서울 강남 정릉으로 이장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언은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⑵ 희릉 :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영돈녕부사 여필(汝弼)이다. 고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1)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해졌으며,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愼守勤)이 반정모의에 반대한 일로 살해된 뒤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 : 인종)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대왕의 능인 헌릉(현 서초구 내곡동)에 안장하었으나,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안로가 정적 제거를 위해, 돌이 많고 물이 찬다고 주장하여, 이를 언짢게 생각한 중종은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고 말았다.

그 후, 1545년(인종 1년) 1월에 승하한 중종을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년)에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가, 중종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질투 때문에 중종의 묏자리가 풍수지리에 좋지 않고, 선릉의 동쪽이 풍수상 길지라 주장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으나,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또한 현재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되어 있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태조는 계비 강씨를 미워한 아들 태종덕에, 중종은 시샘 많은 제2계비 문정왕후 덕에 죽어서도 쓸쓸히 나 홀로 지내고 있는 셈이다.

 

⑶ 예릉 : 조선조 말기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흥미롭게도 뒤주 속에서 죽어간 비운의 세자인 장조의 후손들은, 아버지 영조 이후에 모두 조선의 왕이 되었다. 영조 다음으로는 세자빈인 혜경궁 홍 씨의 소생인 정조대왕이, 3명의 후궁 중 숙빈 임 씨의 소생으로 은언군과 은신군이 있었는데,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철종이 되었고, 은신군이 양자로 들인 남연군(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고, 흥선군의 차남이 바로 고종임금이다.

철종은 소선의 국왕 중 가장 나약한 인물이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대의 세도정치가문이었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중,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가 선수를 써서, 아버지의 역모로 강화에서 귀양 살며 농사짓던 이원범을 낙점하여, 국왕으로 즉위케 하였다. 철종은 즉위 후, 안동김씨의 세력에 눌려 정치와는 무관하게 주색 속에 골아 살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7-1

 

서삼릉에 숨겨진 부끄러운 이야기

 

 일제는 강점기 대 조선 왕릉의 격을 훼손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해 있던 왕들의 태실과 후궁 왕자 공주들의 묘들을 집중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서삼릉의 경내로 이장해 버렸다. 따라서 서삼릉의 경내엔 3개의 릉과 소경원을 비롯한 3개의 원, 후궁들과 왕자 공주의 묘 46기, 태실 54기가 있는 커다란 능역이 되었다. 태실의 경우, 날일자 모양의 울타리를 세우고, 제멋대로 비석을 세우는 등, 훼손의 정도가 도를 넘었다.

 

 군사독재시절에는 축협에 능역의 대부분을 내주고 시범낙농단지를 조성하여 축협 초지로 사용하게 했다. 88 서울올림픽 때에는 능역의 부분들을 훼손하여 마장마술경기장을 만들었다. 일제도 아닌, 우리 정부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을 동물의 배설물로 오염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서삼릉 능역은 현재 여기저기로 찢겨나가, 권역이 서로 분할된 채, 각 권역은 허가 없이 서로 통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일반 시민들에게는 서삼릉이 아닌 서이릉만을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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