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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연길, 두만강, 백두산

입국절차를 마치고 빠져나온 연길국제공항. 작고 아담했는데, 외양이 비행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공항 밖 풍경

 

미니버스에 올라 여정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대륙을 달렸다. 도로 양 편엔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밭이 이어졌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두만강가 도문이었다. 중국에서는 투멘, 북한에서는 난양이라고 하는 표식이 서있었다. 공산주의 국가는 왜 별들을 국기에 다는 걸까. 북한 깃발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나루 건너편이 바로 북한 땅이다. 강 폭이 약 100여 미터 정도나 될까.

 

 대나무 뗏목을 타고 두만강을 유람했다. 전면이 북한 땅이다. 북한 땅 가까이 다가가도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얼핏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누런 군복의 인민군을 보았다. 몸을 숨기고 있는 북한 군인들을 지척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전면에 보이는 곳은 중국 땅이다. 아파트도 있고, 유람객도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났다.

 

반대로 왼 쪽이 중국, 오른쪽이 북한이다. 

 

대나무 뗏목 나루인 중국으로 되돌아 간다. "두마안 가앙 푸른 무울에 노 젓는 배애사고옹~ 흘러간 그 옛 나알에 내 니임을 시읻고~ "... 90년대 말, 타계한 김정구 님의 옛 노래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왼쪽이 북한, 정적이 감돌고, 오른쪽은 중국, 중국 땅에는 사람의 집들이 보인다.

 

표식을 지나 나루로 가는데, 날씨가 더운 모양이다. 백주 대로에서 웃통을 벗은 발가숭이 어른들이 눈에 띈다.

 

북한으로 가는 철교의 국경문. 버스를 타고 두만강가를 달려 용정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두만강 철교를 스친다. 철교를 지나면 북한이다.

 

 강 건너엔 북한 기차가 우리가 탄 버스와 경주하듯 나란히 달렸다. 화물찬데, 짐칸에 사람들이 탔다. 나란히 달려가며 한참이나 그들을 외계인 모양 바라보았다.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는 학교, 옛날엔 용정중학교였다. 기념관 앞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었다.

 

대성중학교 본관

 

 사람은 간 곳 없고 기념관에서 색 바랜 사진들로만 그들을 추모했다. 윤동주, 문익환 님의 사진이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돌아가셨고, 문익환 님은 해방된 조국에서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 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한편, 이들과 동창이신 장준하 님은 학병으로 일제에 징집되어 나갔다가 중국에서 털영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셨다. 그 후 '사상계' 주필을 하시면서 필화 사건도 겪으셨고, 1975년 포천 약사봉 등산 중 돌아가셨다. 민족정기를 갖고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거셨던 분들은 탄압 받고, 고생만 하셨다.

 

가운데 사진은 '김일성, 최현, 안길'인데 이들도 대성학교 출신인 듯...

 

  민족 역사의 아이러니다. 광복군으로 독립운동하다가 민주주의와 민족 정기를 위해 헌신하신 분은 핍박받다 의문사하셨고,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관동군 장교 출신은 대통령이 되어 그를 억압했다. 아직 선생님 죽음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민족 정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일신영달을 위해 조국까지 버렸던 수많은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영달을 누리면서 조국을 위해 일한다고 합리화하며 지도자로 군림하는데도 백성들은 별 생각 없이 지지하고 만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대성중학교 기념관에서 방명록에 서명하고 성의 표시로 기부금을 내고 나왔다.

 

차창 밖으로 연길 시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국 가면 제일 못마땅한 것이 돌려가며 먹는 식탁이다. 점잖은 체면에 맛있는 것 먹겠다고 마구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찬도 대부분 기름에 튀긴 것이라 느끼하기도 하고... 한식으로 나왔는데, 성의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연길 시가

 

  야밤에 백두산 아래 호텔에서 묵고, 아침에 잠깐 호텔 밖에 나왔더니, 길거리에 장이 섰다. 보따리마다 한약재와 산삼들이 대부분이었다. 믿을 수도 없고... 산삼이 정말 많았다. 길가 휴게소에서도.. 노점에서도... 산삼 천국이었다. 그런데, 사 먹는 사람이 있긴 있나 보다.

 

 장백산이라고 등소평이 1983년에 써 박아 놓았다.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언제 중국과 갈라 먹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호텔에서 나와 백두산 주차장부터 도보로 매표소까지 이동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장백산이다.  장뻬이 산. 우리 땅을 우리가 가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오른다는 것이 참 서글프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백두산 정상까지 오르는 찝차 승차권. 가이드가 나눠주는 대로 받아 보았다.

 

SUV를 타고 백두산을 오른다. 운전자 포함  7인승이다.

 

유리창을 잘 닦지 않아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깨끗하지 않다.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저 아래 SUV 승강장에 내려서 올라왔지만 구름이 잔뜩 내려앉았다. 

 

  그런데, 구름 때문에 천지가 보이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불자 잠깐 사이에, 거짓말처럼 구름들이 몰려 지나가고, 천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구름 때문에 렌즈 초점이 잡히지 않고, 렌즈가 헛돌기만 해서, 참 난감했다. ' 똑딱이만도 못한 카메라라고 한탄하며, 안타까움에 식은땀만 흘렸다.

  백두산을 올라도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30일도 못 된다는데, 이렇게 보게 된 것도 큰 기쁨으로 여겼다. 한라산에 올랐다가 구름 속에서 비만 홀딱 맞고 가시거리 10여 미터라, 길만 찾아 헤매다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원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벼르고 있지만 아직 실행을 하지 못했다.

 

다시 SUV를 타고 애초 차량 출발지로 내려왔다.

 

  비룡 폭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소형 셔틀버스로 도착한  비룡 폭포(중국에선 장백 폭포) 아래 주차장. 이제 도보로 폭포까지 걸어갔다.

 

그림에서 보던 비룡 폭포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런 장쾌한 물줄기는 처음 보았다. 폭포 오른 쪽으로는 폭포를 우회하여 천지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실로 까마득한 계단이었다. 1박 2일을 보니 고생 많던데. 오르면 바로 천지 호숫가라 천지물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던데...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폭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로 나섰다.

 

뜨거운 화산수가 김을 뿜으며 솟아올랐다.

 

화산물에 삶은 계란을 사 먹고는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일본 하코네 계란은 까맣던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버스를 타기 전에 백두산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땀을 닦으며 백두산 정기도 느껴 봐야겠다, 이제.

 

온천 후, 상쾌하지만 조금 나른한 기분으로 온천장 앞 뜰에 있던 야생화 하나를 찍었다.

 

  중국 가이드가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다. 버스 안 승객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라 무척 시끄러웠다. 그런데, 뒤에 탄 중국 남자가 자꾸 나보고 중국말로 물었다.  내가 중국인처럼 생겼나 보다.  할 수 없이 "아임 코리안""노~ 차이나맨!" 아렇게 소리쳤다. 알아 들었으려나.

 

연길로 가는 길에 가이드가 이끄는 북조선 외화벌이 상점에 들렀다. 진짜인지 짝퉁인지 알 수 없다.

 

  북한에서 직접 경영하는 상점이란다. 일행 중 여러분이 김일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비싼 약재들을 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 보아도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북한 직영점이라는데, 인적 없는 공터에 뎅그라니 상점 하나 열어 놓고 한국인만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것이 직영 상점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씁쓸... 언제나 가이드 말은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쇼핑을 하다 말고 나와서 주변을 산책하던 중, 큰 비석이 있어 무심코 보았더니, 당나라 때 발해 사신들이 조공 바치러 다니던 길이라네, 이런 젠장...

 

인가도 없는 길가에 뎅그라니 놓여 있는 북한 직영 상점이라는 잡화점. 암만 봐도 짝퉁 같은데...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연길로 간다. 그 길이 장난이 아니다. 어찌나 길고 지루하던지.....

 

  버스는 여러 마을과 도시들을 지나치며, 무한대로 달려간다. 언제 다시 보지 못할 차창 밖 풍경이라 하나하나가 아쉽다. 피로감이 몰려와 졸다 깨다 반복하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 보지만, 온몸이 저려 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평야도 지나고, 작은 마을도 지나며, 넓은 호수도 스쳐가기도 하면서... 또 산길을 타고 넘기도 했다.

 

 드디어 연길 시내 호텔에 도착했다.

 밤에 연길 야경 구경하러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엉뚱한 호텔에 내려줘서 낭패 볼 뻔했다. 내려주는 대로 호텔 안에 들어갔더니 우리가 짐 풀었던 곳이 아닌 거였다. 말도 통하지 않고, 우리 호텔 이름도 정확히 모르겠고, 중국 동전이 없으니 가이드에게 전화도 못하겠고... 패키지여행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모든 걸 가이드가 챙겨 주니까 신경 쓰지 않는 거였다. 프런트에 가서 손짓 발짓해가며 간신히 기억해 낸 호텔 이름을 한자로 적어주고서야 비로소 가이드와 통화하게 되었다.

 수십 년 전 북유럽에 연수 갔다가 택시 기사가 한국 대사관에 내려준다는 것이 북한 대사관에 내려줘서 본의 아니게 북한으로 가게 됐던 지리 선생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분은 택시 기사의 실수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그 덕에 그분의 가정은 파탄 나고 말았단다. 그분을 기다리며 수절하던 그 아내는, 북한에서 재혼하여 수령님 덕분에 잘 살고 있다는, 남편의 인터뷰를 보고는, 혼절한 끝에 병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어처구니없는 민족의 비극이다.

 북유럽도 아닌 북한의 맹방인 중국에서 길을 잃어 어찌나 당황했던지... 특히 연변에는 북한 공작원도 많다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호텔 방 창밖으로 내려다본 호텔 뒤의 연길 시가이다.

 

 이제 백두산 여정을 마치고 연길을 떠난다. 중국 내선인 남방 항공을 타고 북경으로 가기 위해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 비행기 트랩으로 향했다.

 

  조선족 자치구인 연변에 조선족이 점점 줄어든단다. 대도시로 빠져나가거나, 한국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다가 조선족 자치구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중국이지만 우리 땅이거니 하며 알고 지내는데, 조선족 자치주마저 없어져 버리면, 완전 중국이 날로 먹는 거 아닐까.  고구려 역사도 지네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인데...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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