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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12월 3일. 스산한 겨울비가 내렸다. 현관문을 나설 때 날리는 빗방울에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약속된 산행인지라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방풍복 위에 작은 빗방울들이 맺혀 굴렀다. 다행히 버스가 남진했을 때, 그쪽은 잔뜩 흐리기만 했을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간혹 구름사이로 빼곡히 얼굴을 내민 흐린 날씨 탓에 달빛 같은 태양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경북 상주 화북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등반경로는 문장대에 올라 주능선을 타고 천황봉까지 갔다가 그 너머 법주사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흐린 날씨였지만 시계는 양호하여 출발이 순조로웠다. 30년도 더 지난 예전에 문장대에 올랐던 적이 있었기에 이번 산행은 의미가 있었다. 강산도 세 번은 더 바뀌었을 세월에 젊은 시절의 추억들이 피어올랐다. 문장대 정상부근에서 가파른 돌계단에 숨이 차올랐던 일이며, 문장대 꼭대기에서 툭 터진 사방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꿈꾸었었던 일들이 겨울바람에 스쳐 지나갔다. 앞서 오르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아도 정겨워졌다.

 

이정표를 보니 주차장에서 문장대 까진 3. 3km로 그리 멀지 않은 길이다. 벌써 반이나 올랐다는 안내 표식에 힘든 줄도 모르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계곡 사이를 건너 지르는 다리를 건너기도 하며, 돌길을 지나기도 하고, 낙엽 쌓여 푹신한 탄력 있는 산길도 지났다.

 

신호대 사이로 돌계단이 나타났다. 산행 때마다 만나는 돌계단은 정말 싫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은 더욱 그렇다. 등반객들의 관절 보호를 위해서라도 제발 돌길만은 치워주셨으면 좋겠다. 요즈음 지자체마다 아름답고 쾌적한 등반로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던데, 우리네 국립공원도 그렇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자연친화적인 나무계단이 사치하다면, 잡목으로 턱을 만든 값싼 계단이라도 좋겠다. 제발 돌계단만은 삼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계단을 오른다.

 

준봉들과 지나온 고갯마루가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여름산천이 아름다운 수채화라면, 가을산은 화려한 유화, 겨울산은 담백한 수묵화 같다. 봄산은 새로움과 경이감을 주는 창조적인 산이다. 겨울철의 무채색에서 이파리보다도 먼저 노란 산수유 꽃을, 빨간 진달래, 눈부시게 하얀 야생벚꽃들을 하루가 다르게 뿜어댄다. 그래서 봄산은 경이롭고 창조적이다. 똑같은 산이라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놀라움을 지닌 산이 바로 봄산이라 생각한다.

 

봄산은 일일신 구일신(日日新苟日新)하는 경이로움을, 여름산은 상쾌한 녹음을, 가을산은 화려함의 극치를, 겨울산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개인적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산이 좋지만, 무채색 전경과 나목들 사이로 시계가 깊어지는 겨울산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여름산행은 시원한 시야에 흐르는 땀이 고역이라면 겨울철엔 칼바람만 뺀다면 산행이 쾌적하다는 생각이다.

 

문장대가 가까워졌다는 이정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호대 사이로 눈길이 나타났다. 푸른 신호대와 하얀 눈길, 대조된 두 색깔이 너무 아름답다. 구불구불한 등반로에 잎 떨어진 잡목들이 정겹다.

 

잘 만들어진 나무계단 저 끝에 하늘이 맞닿아 있다. 정상이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정상을 오르기 전의 기대감과 설레임! 그것이 바로 등산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충북과 경북도를 가르는 고갯마루 이정표. 왼쪽으론 천왕봉, 오른쪽으로 문장대, 문장대는 바로 지척에 서있다.

 

고갯마루 높은 곳에 올라 급한 마음에 천왕봉 쪽을 바라보았다. 주능선을 따라 기암들이 머리를 조금만 내밀고 있다. 이것마저 보지 못했더라면 속리산은 그저 미궁에 빠져 실체를 짐작할 수도 없는 산이었을 거다.

 

문장대를 바라보았는데, 도무지 옛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법주사 쪽에서 올라왔었는데, 방향이 달라 그런가 보다. 아무튼 전혀 옛날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만 문장대보다 더 높이 서있는 철탑이 눈에 거슬렸다. 철탑 옆엔 또 이동통신 안테나가 서있다. 세상을 떠나 세속을 등진 산이란 이름의 俗離山에 걸맞지 않은 풍경이었다.

 

문장대 안내문. 안내문보다 그 뒤 철탑아래 휘두른 철조망이 가슴 아프다. 인간을 경계하며 단절을 위한 금역의 표시일진대, 아름다운 자연에 저런 몰골을 꼭 보여줘야 할까 싶다. 도대체 철조망, 저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저토록 흉측하게 세상사람들을 경계시켜야 하는 걸까. 청계산에서도, 관악산에서도, 심지어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서도 저런 철조망을 만났었다. 참으로 선량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적개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지라 아니할 수 없겠다.

 

안내문에는 본디 운장대였는데, 요양차 내려왔던 조선조 세조가 암봉 위에 놓인 책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세조는 참으로 나쁜 왕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왕이었던 조카를 죽이고, 자신의 아버지께 충성했던 많은 충신들을 살해했다. 그런 세조가 저 암봉에 올라가 읽었다는 책이 오륜삼강이라니 참 어이없다. 조카 단종의 신하였던 자로써 역모하여 왕을 내쳤다가 죽여버리고, 수많은 충신들을 살해했던 그가 삼강오륜을 논한다면 그건 엄청난 위선이다. 그의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 역시 왕권을 위하여 자신의 이복형제마저 참살했으니, 말해 무엇할까마는...

 

그러고 보면 유교는 철저한 지배 이데올로기다. 권력을 가진 자, 횡포하고, 권력 없이 따르는 자, 무조건 복종하라는 철저한 지배적 사상이다. 주군인 왕을 향하여 무조건적 복종을 해야 하니 '忠'이 필요한 것이고, 집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하자니 복종만이 미덕이니 바로 '孝'라는 거다. 모두가 강자독식을 위한 논리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는 위를 향해서는 아부를 아랫것들에겐 무소불위의 권위를 내세우는 비인간들을 양산하는 거다.

 

그런데, 평등사회이자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충효'교육이 극성을 떨 때가 있었다. 이른바 유신시대. 학교마다 무지하게 큰 글씨로 '충효'를 써붙여 학생들에게 강요했었다.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은 학교를 책임진 관리였으며, 교련교사와 윤리 선생들이 앞장서서 지배자의 궤변을 합리화했었다. 학생들은 그런 내막도 모르고 세뇌되었었다. 앞장서서 설쳐대었던 수많은 선생들은 제 가족의 목구멍 한 숟갈 밥덩이를 위해 게거품을 물었었다. 명치유신을 표절하신 그 양반 지금 까지 살아 계셨다면 충효교육이 바탕이 되어 순치된 백성들 위에서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리나라는 아마 북한보다 먼저 개발한 핵무기를 지니고, 경제 대국이 되어 세계 속에 부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까.

 

관리들과 재벌들은 두 얼굴로 밤낮이 다른 생활을 하는데, 백성들은 그들이 흘린 빵 부스러기 좀 주어 먹으면서, 가진 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신의 빵 조각을 자랑하면 시셋말로 좀 행복해질까. 고삐 풀린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널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조 있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인내천(人乃天)'을 존경한다. 우리 모두가 하늘이니까. 빈부귀천을 떠나, 우리 모두 존경의 대상이 될 테니까 인간으로 대우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늘이면 너도 하늘이니까. 나 스스로를 공경하면서 너도 공경하며 살아가겠다. 국민소득이 늘어났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며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데도 상대적 빈곤감 속에 내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구멍 뚫려 찬 바람이 드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문명화된 이 세상에 양심을 저버리고 부정부패, 살인강도, 성범죄가 늘어 가는 것도 물질 만능주의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장대의 세조를 생각하며 본능대로 살아가는 진화 하여 털 없어진 원숭이 떼 이야기를 떠올렸다.

 

갑자기 구름안개가 몰려왔다. 아름다운 기암과 산봉들이 구름 속에 사라지고 있었다.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 급하게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문장대 위에 올랐으나 급히 몰려오는 안개구름 때문에 시계는 점점 불량해졌다. 구름 안개 때문에 앞 풍경을 가늠할 수 없으니 그림으로라도 대신해야 할까 보다.

 

정상 위에서 모두들 아쉬워 찬 바닥에 앉아 마음을 달랜다. 안개구름과 함께 싸락눈이 몰려왔다. 자잘한 눈가루가 뺨을 때렸다. 때리는 눈가루보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갈등이 일었다. 천왕봉까지 가야 하나 아니면 이곳에서 바로 하산해야 할까. 기온도 뚝 떨어져 카메라 셧터도 잘 눌러지지 않았다. 장갑까지 벗고 나서 몇 컷 찍어 보지만 사방이 안개구름으로 막혀 있어 절망적이었다. 4 년 전 가을, 한라산에 올랐을 때도 이랬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등반했는데 4~5m 전후방만 보였지,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파른 길을 올라도, 밋밋한 능선을 걸어도,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길 밖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바로 그랬다.

 

갈등하다가 미련 때문에 결국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인적이 끊어진 것이다. 대부분 등산객들은 문장대 너머로 바로 내려가버리고 천왕봉 코스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같이 갔던 산우회 사람들도 내가 문장대 위에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먼저 떠나, 어쩔 수없이 홀로 적막한 산길을 걸었다. 싸락눈을 맞으며 점점 어두워지는 날씨에, 가끔은 아주 차가운 칼바람을 만나며, 홀로 깊은 이 속리산 산속을 걷는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더구나 이정표 없는 갈림길을 만날 때면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길을 잃는다면... 추운 이 골짜기 어느 귀퉁이에서 동사할지도 모를 일이겠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져보면서 문장대 부근의 통신 안테나를 떠올리곤 실소를 머금었다.

 

걸음을 재촉하니 말소리가 들렸다. 부지런히 걸어 사람들을 반갑게 만났다. 안갯속에 숲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앞사람과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것이 아마추어 산행의 한계인 것 같다. 아마추어라 긴 산행에서는 다리를 쉴 겸, 잠깐 동안 2~3분 쉬다 보면, 낙오되기 일쑤였다.

 

안갯속에 휴게소가 나타났다. 이 산 중에 휴게소가 놀라웠다. 휴게소 안에 들어서니 등반객들이 뿜어대는 열기가 후끈했다. 사람들은 컵라면, 또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는데, 나는 잠깐 앉았다가 시간이 아까워 홀로 나왔다.

 

또 홀로 걸었다. 큼직한 이정표가 나타날 때마다 안도하곤 했다. 천왕봉 방향 표식을 확인하며 걸었다.

 

안개가 짙어져 시야를 점점 가렸다. 참으로 허망한 산행이라 생각하며 촬영을 포기하고 목에 걸려 존재감조차 잃어버린 카메라를 황급히 배낭에 담아 넣었다. 마침 아늑한 숲 속 자리를 발견하고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보온 도시락이라지만 추운 날씨 탓에 약간의 온기 흔적만 있었다. 싸락눈을 맞으며, 혼자 산속에서 먹는 도시락, 눈과 함께 온기를 잃은 국물을 마셨지만, 그런대로 만족했다.

 

갈림길마다 몇 번을 하산 유혹으로 갈등하다가 드디어 천왕봉 정상! 정상에 올랐다. 산정은 예상과 달리 작은 암봉이었고 표지석도 아담한 크기로 정상석으론 너무 겸손했다. 천왕봉이라 새겨진 글씨뿐 너무나 고즈넉하고 적막한 풍경에 카메라를 꺼내 기념으로 표지석만 하나 찍었다. 천왕봉과 천황봉의 의미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아마도 나름대로 생각하기엔 일제의 간악함 때문이 아닐까. 표지석도 이젠 주권을 찾았으면 좋겠다.

 

표지석 앞의 작은 나무의자 위에 배낭과 지팡이를 놓고 혼자만의 간단한 기념을 했다. 

 

표지석 우측에 안내도를 살펴보며 하산길을 미리 그려 보았다. 이제 되돌아 내려가다가 좌측으로 하산하면 그 끝에 법주사가 있다. 다시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안갯속을 걸었다.

 

천왕봉에서 법주사 까진 참으로 머언 길이었다. 이정표를 보니 6.6km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7km 이상 되는 것 같았다. 가파른 돌계단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쌓아 만든 계단이 아니라 육중한 바위를 정으로 쪼아내어 만든 계단이니, 이는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대로 수 백 년은 되었을 것이었다. 마모 정도가 심했기 때문이다. 정으로 바위를 조던 조선 시대쯤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길고도 지루한 법주사까지의 노정을 마쳤다. 법주사 일주문을 나서고 상업지역에 다다르니 법주사 쪽의 등반 안내도가 있었다. 그림으로 보면 산세가 매우 아름다워, 산행을 했지만 산행의 기쁨보다는 미련감만 가득 담고 말았다. 날 좋은 날, 다시 속리산을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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