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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

 역사는 언제나 승자 편이다. 궁예는 미륵불 신앙을 가진 민중불교 신봉자였다. 그는 메시아처럼 미륵불이 민중들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어쩌면 자신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미륵의 존재로 행세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신라 왕족으로 태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박해받다가 태봉국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백성들을 떠받든다. 궁예는 궁궐 가까운 강가에서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강을 '한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믿었던 부하가 모반을 일으켜 그를 죽이려 했다. 궁예는 자기를 지지하는 일부의 군사들을 거두어 이 산에 들어와 자신의 신하였던 왕건과 맞섰다. 그러나, 결국 궁예는 왕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 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궁예의 죽음에 백성들은 통곡했고, 궁예의 주검을 안은 이 산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래서 '鳴聲山'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왕건의 기록처럼 궁예가 포악했기에 정변을 일으켰다면, 백성들이 궁예를 미워했다면 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산까지 울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오백 년 뒤 왕씨 후손들은 이성계에게 왕씨 정통성마저 부정되다가 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무튼 궁예의 죽음을 애도하며 휴전선 한가운데 자리한 태봉국 궁궐터는 가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전설과 자취가 서려 있는 명성산을 찾았다. 양력으로라도 쌍십절날, 그리고 토요일 맑고 깨끗한 가을날씨에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에 떠밀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정호수 초입에 있는 등산로 입구부터 인파들로 북적였다.

 

등산로 옆의 수려한 계곡

 

계곡을 끼고 조금 오르면 폭포가 나타나고, 억새밭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아 주변을 본다는 것이 사치스럽다. 그저 이정표를 따라 사람들에 묻혀 올라갔다.

 

탁 트인 골짜기 위로 하늘이 뻥 뚫렸다. 빙과를 파는 장사꾼의 외침을 뒤로하고 능선 위에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위로 올랐다.

 

그 유명한 명성산의 갈대밭이다. 하얗게 눈 내린 것처럼 갈꽃이 만발했다. 소문대로 장관이었다. 이 갈대밭은 화전을 정리하고 조성한 것이다. 70년대까지도 화전민들이 있었다. 발 붙일 땅뙤기 하나 없던 백성들이 산으로 올라 산비탈을 일구어 작물을 심어 먹었었다. 산림녹화 사업과 새마을 운동으로 화전민들은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그 화전이 갈밭이 된 것이다. 지금은 잘 가꾸어 오히려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화전민의 눈물이 배인 이 갈밭을 그저 아름답다고 감탄만 할 수는 없겠다.

 

갈밭 사이에 등산로를 만들었다. 등반객들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갈밭을 보호하는 것이다. 갈꽃이 눈밭이었다.

 

갈대밭의 정상인 팔각정 주변 

 

갈밭을 지나 팔각정 능선에 오르니 저 멀리 사격장이 보였다. 짐작하건대 전차사격장쯤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휴전선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분단의 아픔이 아름다운 산천을 찢어놓는다. 역시 명성산은 슬픈 산인 모양이다. 

 

팔각정 주변 풍경

 

갈밭을 지나, 팔각정을 지나 능선 위로 올라갔다. 팔각정에서는 음악회를 한다며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다. 그리고 우편엽서와 편지 쓰기 행사도 열렸다. 사람들을의 왁자지껄한 소음과 어지러운 풍경에 팔각정을 빨리 벗어났다. 능선을 따라 좌우를 동시에 바라보며 걷는 산행에, 볼 것이 너무 많았다.

 

능선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호수가 보였다. 그 유명한 산정호수다. 산정호수는 자연호수가 아니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저수지이다. 지금은 위락시설이 즐비한 유원지이지만 이곳 역시 일제가 우리 민족을 수탈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해방 후 38 이북으로 북한이었던 이곳에 김일성은 별장을 세웠다. 그래서 김일성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 산정호수와 강원도 화진포가 널리 유명해졌다.

 

뒤를 돌아 지나온 길과 호수를 조망했다. 가을빛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삼각봉을 알리는 이정표. 능선 만을 따라가기에 산행에 어려움은 없지만 이정표가 친절하게 여정을 도와주었다.

 

저 멀리 철원 들판이 보였다. '강포리'라는 신철원 부근의 들이다.  

 

마침 야생화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구절초.

 

삼각봉. 화강암 표지석 위에 해태가 앉았다. 무슨 의미 있는 해태인지 모르겠지만, 경기도 포천시임을 밝히고 있었다.

 

드디어 명성산 정상이다. 이곳에는 다행히 해태가 없다. 그리고 이곳은 강원도 철원군이다. 그러니까 명성산의 정상은 강원도에 있다. 궁예왕의 궁궐터는 이곳에서 북방 20여 km 전방에 있을 것이다.  땅이 바짝 말라 먼지가 풀썩였다. 지표면 위로 아마 5cm 정도는 먼지였다.

 

정상을 지나 북진 방향 그대로 모퉁이를 지나니 궁예봉이 나타났다.

 

능선에서 내려와 숲길을 걸으니 이정표가 나타났다. 직진하면 궁예봉, 좌회전하면 산안 고개! 그 많던 인파는 정상에서 되돌아갔나 보다. 직진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궁예봉에 올라 궁예의 흔적을 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되돌아와 산안고개 방향으로 하산했다. 능선 위에 그 많던 이정표는 모두 사라지고 물 빠진 계곡에 바위들을 딛고 내려오는 하산 길은 조금 힘들었다. 길도 좀 보수하고 이정표도 세워 주시면 등반객들이 감사할 텐데, 이정표도 없는 길을 힘겹게 터덜 터덜 내려왔다. 주마간산이란 말리 생각났다. 혼자 이정표만 보면서 앞만 보며 걷는 행태를 반성해야겠다. 그러나 그 자취들을 더듬는 산행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 보기도 했다.  

 

신안길로 내려가는 길엔 사람들이 없어서 호젓했다.

 

하산해서 명성산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는 쾌청했다. 산정상과 궁예봉은 오늘도 내일도 패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겠다.  

 

 산 아래인 산안고개 주변의 식당촌

 

 사람들이 붐비는 토요일 산행이라 호젓하지 못했지만 뜻깊은 산행이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명성산에 서린 궁예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었다. 갈밭의 아름다움보다도 이 땅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많은 민초들의 간난이 가슴속에 저며 오는 것 같은 대략 5시간 정도의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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