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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어렸을 때, 그러니까 국민학교시절 미군이 발행하던 '자유의 벗'이란 잡지가 있었다. 당시에 그 사진 잡지는 사진화보 중심이었기에, 어린애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충족시켜 주었었다. 더욱이 그 잡지는 종이가 두껍고 질겨서 책을 싸는데 아주 좋았다. 그때 그 잡지에서 보았던 사진이 용미리 석불입상이었다. 그 후, 군생활하던 때, 추운 겨울날, 작전트럭 적재함에 실려 작전지로 이동하다가 이 석불입상을 보았었다. 시간이 있었더라면 내려가서 보았을 텐데, 쫄병으로 볶이며 얽매인 탓으로 찬 바람 속에 석불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다만 보면서 아쉽게 지나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석불입상이었다. 멀지도 않은 가까운 곳에 두고서 이제야 찾아보게 된 것은 기억 저편에 너무나 깊이 박혔던 때문이었다.

 

 

  석불입상은 용암사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에 용암사를 찾아 입력하고는 파주 광탄 용미리로 향했다. 요즘 길 답지 않게 왕복 2차선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용암사를 찾아갔다. 본디 이 고갯길은 한양에서 개성, 의주로 가는 헤음령이었다는데,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에 밀려 시골 한적한 고갯길로 바뀌었다. 용암사 부근 3거리에서 좌측 산 중턱에 하얗게 빛나는 육중한 2 위의 석불입상이 눈에 띄었다. 한 걸음에 용암사 턱밑에 차를 세우고 용암사를 찾아 올라갔다.

 

  가운데가 대웅전, 우측이 종무소, 추녀 끝이 살짝 드러난 곳이 범종각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절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거기에 모처럼 파란 하늘이 너무 반가웠다.

 

 세 칸 짜리 맞배지붕의 대웅전은, 이 절이 서울 근교임에도 꾸미지 않은 모양으로, 수수하고 서민적인 모습으로 다가섰다. 정치적 후원을 받았던 사찰치고는 너무 작은 모습이어서 의아했지만...

 

  에밀레종을 따서 만들었다는 범종, 양각된 비천상이 너무나 뚜렷하여,세월의 흔적은 엿볼 수 없어 아쉬웠다.

 

  어딜 가나 절터는 참으로 명당이다. 깊은 산중에도 어김없이 대웅전은 남쪽을 향하여, 그윽한 햇살을 받고 있다. 용암사도 뒷산인 장지산을 병풍 삼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 그윽한 앞 뜰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들이치는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받기 위해 스님들도 보료를 햇볕에 널어놓았다. 빨간 방석 두 개가 오후 뜨거운 햇살을 가득 받고 있었다. 가람의 배치는 전통적으로 계단 아래 석탑이 있고 좌우에 석등이 있는 전형적 모습이었다. 석등 기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시 구국통일을 기리며 세웠다는 명문이 있었다.

 

 법당안 부처님 모습, 큰 본존부처님과 좌우에 두 위의 작은 보살님들이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는데, 상호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세 분 다 눈을 가늘게 뜨셨다. 세상일을 보다 명철하게 살피시려는 뜻은 아닐는지...

 

  대웅전 좌측의 미륵전 옆에 세운 동자상과 석탑, 그 사이에 작은 안내판이 흥미롭다. 안내판의 내용을 인용하면, 고 이승만 대통령 모친께서 쌍미륵 석불에 득남 발원을 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1954년 대통령 재임 시, 몸소 용암사를 방문하여 남북통일과 후손잇기를 염원하여 이 동자상과 7층 석탑을 세웠다. 동자상은 정면에서 좌측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웠으나,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망명길에 오르게 되자, 재야단체들이 문화재를 훼손했다고 비판하여, 1987년 철거하여 종무소 우측에 모셨던 것을, 현주지 포운당 태공 스님이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 있는 희미한 기억으로도 동자상인지 석탑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석불 어깨에 올려진 모습이었다. 오늘 석불을 처음 보았을 때, 다소 어색하단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래서 그랬나 보다.

 

  1987년이란 역사적 의미가 큰 해이다. 독재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가 끝나던 때니까, 비로소 이승만 절대 권력의 흔적도, 민중의 힘에 지워졌으리라. 해방 후, 자유당 정권부터, 박정희,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유와 민주를 외치다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고통을 겪었던지,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나로서도 몸서리쳐진다.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후원했음에도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용암사가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지 못했던 전력이 가히 이 절에 미치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시골의 작은 절에서도 사찰 중흥을 위하여 불사를 일으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동자상 부근에서 바라본 용암사

 

  미륵전과 대웅전 사이의 계단을 조금 오르니, 마애석불입상이 나타난다. 둥근 갓을 쓰신 분은 남자, 사각모를 쓰신 분은 여자미륵불이다. 인적도 드문 이곳에 중년의 여인이 불상 앞에 엎드려 축원하고 있었다. 그분의 기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석불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자 미륵불은 얼굴이 작고 신체가 크며, 두 손으로 연줄기 모양의 무엇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고, 얼굴이 큰 여자 미륵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었다. 남미륵상은 위풍당당하게 우뚝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여미륵상은 수줍은 듯 몸을 좌측으로 조금 튼 채 투박한 두 손을 모아 소망을 모으고 있었다.  금이 간 것처럼 입술 양옆으로 쭉 찢어진 선이 안타깝다. 손쉽게 자연석을 이용하다 보니, 목 위 입술 까지를 중간 받침으로 삼고, 그 위에 얼굴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연민의 정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에 가득 찬 현세인들이 그 고통을 구원해 주실 미륵불을 만들었으니, 어쩌면 어려운 삶의 현실을, 금이 간 여자 미륵불 얼굴로 형상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내 멋대로 구구한 억측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석불을 돌아보기 위해 우측으로 돌아서 비탈길을 올랐다.

 

  석불의 뒷모습, 앞에서 보면 바위를 깎아 세운 육중한 입상으로 보였는데, 뒤에서 보니, 산비탈에 뒷면이 묻혀있는 바위석을 다듬고 새겨 몸통을 만들고, 그 몸통 위에 다섯 개 정도의 돌로 갓과 머리, 목을 다듬어 올려놓았다.

 

  석불 머리 사이로 전방을 내다보았다. 좌측으로는 멀리 삼각산(북한산)과, 정면으로는 용미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천 년의 세월을 두고 두 분의 미륵부처님은 눈앞에 펼쳐진 사바세계의 변화무쌍한 격동들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을까.

 

  유년시절 기억과 청년시절의 추억이 깊이깊이 숨어있다가, 불현듯 나타났는가 싶다. 되돌릴 수 없는, 기억 저 편의 세계가 아련한 영상으로 떠 오른다. 아름답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용암사 미륵전을 지날 무렵, 대웅전 마당을 건너질러 온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내 다리에 몸을 기대었다. 갑자기 당하는 일에 내심 놀랐지만, 허리를 구부리고 가만히 그 고양이를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고양이는 만족한 듯 눈까지 감고 길게 누었다가, 내가 일어서자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석불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그 고양이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떠날 때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양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국가의 보물로 지정된 석불입상을 관리하면서도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의 용암사의 모습이 불도에 정진하며, 중생들을 구제하는 사찰 본연의 모습은 아닐는지. 국립공원이나 대도시 근교의 대부분의 절들은 거창하게 일주문을 세우고, 금물을 칠하며, 정체불명의 배불뚝이 화상을 모셔놓고, 부귀로 중생들을 현혹하려는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그건 불도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앙관이 제 아무리 기복신앙이라 해도, 종교는 그 본연의 모습을 잃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첨탑을 쌓으며 기세 있게 부와 신도를 축적하기에 몰두하고 있는, 일부 신흥종교의 행태도 마찬가지이다.

  용암사에서, 가물가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상 하나를 이제야 뚜렷한 사진으로 담아냈기에,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 한 번씩 펼쳐 보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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