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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소나기 마을 황순원 문학촌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소재 황순원 문학촌, 그동안 많이 들어 봤지만 아직 방문은 하지 못했던 곳이라, 세미원 방문 뒤에 그곳으로 향했다. 세미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황순원 문학촌이란 바위 표지석을 보고 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대의 차들이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문학촌으로 오르는 길은 일반차량 진입 금지란 푯말이 서있었다. 차에서 내려 200여 m 언덕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올라갔다.

 

 

 문학촌 앞, 운동장,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했다는옥수수대 더미는 짚으로 대신했지만, 작품 세계를 재현하려 애쓴 흔적들이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산 허리엔 산책로를 만들고, 선생의 소설의 배경지처럼 '목넘이 고개' 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분수대는 물이 말라 휴식 중이었다. 비가 너무 내려서인지 분수대 바닥이 거칠게 파여 있었다.

 

 

 

 계단으로 오르면 문학관 2층 좌측에 황순원 선생의 유택이 있다. 돌아가신 후 천안에 안장했다가, 문학관이 세워지면서 이곳으로 이장했단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2층 로비에 마련한 황순원 연표.

 

 천정까지 이르는 구조물, 투명하게 뚫린 둥근 천정에서 천연광이 들어왔다.

 

 2층, 황순원 기념관 입구.

 

 

 

재현된 선생의 생전 서재

 

 

 

 

 유품들, 전시된 유품들은 어찌 보면 초라하기까지 했다. 공간을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사진 패널에 비하면, 전시된 유품은 만년필, 하나, 선글라스 2 개, 상장 둘... 유족들과 소통이 잘 되는지 유감스럽기까지 했다.

 

 

 훈장이 두 개, 70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하나를 받았고, 박통의 정치적 라이벌로 죽음의 고비에까지 내몰렸던 김대중이 평생의 한을 풀고 대통령이 되어 30 년의 세월을 넘어 선생께 훈장을 수여했다. 박정희 대통령 것은 살아생전에, 김대중 대통령 것은 타계한 직후의 것이었다.

 

선생의 작품관

 

'독 짓는 늙은이', '학',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등의 소개관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소나기' 방이다. 농촌의 서정적 풍경을 배경으로 작은 시내와 징검다리... 그리고 풋풋한 소년 소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역시 2층의 영상관, 초등학교 교실을 형상화해 놓았다. 어린이들의 책걸상에 앉아, 현대적으로 각색한 소나기 만화영화를 보았다. 약 15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인데, 소녀의 죽음 이후, 소년의 꿈이 그 내용이었다.

 

화면에서 소나기가 내릴 때, 천정에서 비가 내렸다. 바람이 불 때는, 천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4D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3층의 다큐멘터리 상영관. 황순원 선생의 생애를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친일하지 않고 암흑기에는 절필하면서, 지조를 지키셨다는 선생, 시인으로 출발하여, 시인으로 그 생애를 마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소설가로만 알았었는데, 시창작도 하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3층 영상실 옆 옥상 위에서 내려다본 문학촌 앞마당.

 

 
황순원(915. 3. 26 평남 대동~2000. 9. 14 서울), 시인·소설가.
 
 본관은 제안(齊安). 자는 만강(晩岡). 시인으로 등단해서 뛰어난 단편소설가로, 다시 장편소설가로 거듭 변신하면서 문학세계를 넓힌 작가이다.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였던 아버지 찬영(贊永)과 어머니 장찬붕(張贊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해 1년 6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다. 오산중학교를 거쳐 숭실중학교를 마쳤으며, 193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2고등학원에 입학, 재학시절 이해랑·김동원 등과 극예술연구단체인 '동경학생예술좌'를 조직했다. 1935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도쿄[東京]에서 시집 〈방가〉를 펴냈다는 이유로 평양경찰서에 29일간 구류되었다. 1939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생활하다 1946년 월남했다.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80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다음 백과>

 


내내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선생의 고향은 북한인데, 아무런 연고가 없는, 양평에 그의 문학관이 서있는 것이었다. 양평하고도 이 첩첩 산골에 무슨 연고로 문학관을 세웠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결국 문학관 직원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소나기' 내용 중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소나기의 배경이 이 문호리는 아니란다. 단지 소설 속에 언급된 양평읍이란 말이 이 문학관을 이곳에 세우게 된 까닭이란 것이다.

주차장 앞 다리를 건널 때 소리를 내며 흐르던 개울을 보았었다. 그 개울을 보면서 이곳이 소설의 배경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은 지나친 나의 상상이었다., 이 문학관은 소설 속의 배경을 찾아 찾아, 소설과 유사한 개울이 흐르는 시골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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