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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풍자와 해학의 대가 - `채만식` 문학관

오락가락하는 빗줄기가 간간이 내리는 가운데, 군산의 금강 하구둑 아래에 있는 채만식 문학관을 찾았다. 선생의 작품 중 '태평천하'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그의 문학관 방문은 감회가 깊었다.

풍자와 윗트, 판소리 광대처럼 한발짝 떨어져 등장인물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집필한 '태평천하'를 읽으면서, 겉으로 웃으면서도, 그풍자 속에 감춰진 일제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가진자들의 비도덕 작태에 눈물지었었다.

문학관 입구에 전시된 선생의 연보 첫머리에 쓰인'濁流(탁류)"처럼 금강 하구에는 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흐린 오늘의 날씨처럼, 아니 우리의 밝고 희망찰 미래가 안개 속에 감춰진 것처럼 탁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전시된 선생의 작품들

밀납인형으로 재현된 선생의 생전 집필 모습

선생의 작품들과 동 시대의 문인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선생의 사진들이 걸려 있는 2층 전시실

문학관 2층에서 바라본 금강하구둑


채만식(1902 ~1950) 전북 옥구 출생
일제강점기의 불안한 사회를 배경으로 지식인의 불우한 삶을 풍자한 소설과 희곡을 썼다.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백릉(白菱)·채옹(菜翁).

아버지 규섭(奎燮)과 어머니 조우섭(趙又燮) 사이의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914년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중에 은선흥(殷善興)과 결혼했으며,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며, 1923년 귀국해 다시 돌아가지 않자 이듬해 장기결석으로 퇴학처분 되었다. 1924년 경기도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취직했고, 192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 여 만에 그만두었다. 1930~33년 〈개벽〉, 1937년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으며, 그뒤 개성·안양 등으로 이사해 가난하게 살면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945년 4월 고향에 돌아왔다. 8·15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잠시 머물렀으며 1946년 이리시 고현에 내려와 있던 작은 형 준식의 집에 기거하다가, 폐결핵이 악화되어 비참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에도 창작의욕은 대단하여 이때 많은 작품을 썼다. 1950년 폐결핵으로 죽었으며,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계남리 선산에 안장되었다.

채만식은 소설을 통하여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고민과 약점을 풍자하고, 사회 부조리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에 〈레디메이드 인생〉, 〈탁류(濁流)〉, 〈태평천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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