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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강진기행-다산과 영랑

 일찍이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을 남도기행 1번지로 꼽았었다. 그래서인지 강진엔 여러 번 들렸었는데, 견문이 짧은 내 식견으로는 선생의 혜안을 살피기 어려웠다. 강진이라면 그저 다산초당과 영랑시인 생가, 상감청자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첫 번 째 행선지로 다산초당을 꼽았다. 다산초당은 이번이 세 번 째였다.

 

 

1. 다산초당

 

 진도에서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은 이제 땡볕으로 바뀌어 뜨겁게 내렸다.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찾아갔는데, 예전과 달리 입구에는 너른 주차장과 웅장한 건물들이 서있었다. 잔디 동산에 조성된 육중한 건물은 다산기념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념관 전시물들을 관람하고 있었다.

 

밀랍 인형으로 재현한 다산 선생의 집필 모습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들으며, 기념관 우측길을 돌아 고개를 넘어 갔다. 더위에 땀이 빗물처럼 흘렀다.

 

고개를 넘어가니 옛날 다산초당의 입구였던 찻집이 나타났다. 예전에는돌담을 둘러친 몇 채의 시골집들이 있었고, 그 돌담 안에는 기린처럼 키가 크고 푸른 나무에서 무화과가 익어가고 있었는데, 오늘 이 마을에는 별장 같은 한옥들이 들어서고, 갈빗집까지 들어앉아 성업 중이었다. 예전의 산길로 오르는데, 비가 많이 내린 후라 미끄러웠고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했다. 게다가 우거진 숲으로 어두워서 모기까지 덤벼 들었다. 그 덕에 다리에 몇 방 물려 물집이 잡혀 부풀어 올랐다.

 

 

초당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초당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 달랐다. 예전의 다산초당이 박제된 것이었다면, 현재 사람으로 북적대는 것은 훨씬 생동감이 있어서 좋았다. 초당 안에서는 녹차체험과 훈장님과 담소하며 예절을 배우는 학습이 한창이었다. 웬만하면 무료로 해도 좋으련만 각각 일금 1000원씩 그 값으로 메겨 놓았다. 초당에서 선생께서 즐기던 이곳의 자생차를 우려 마시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일 텐데, 그러지 못함이 애석하였다.

 

훈장님과의 예절체험

 

 

 

 

2. 영랑 생가

 

 강진읍에 있는 영랑 생가 주변은 아주 말끔해졌다. 더군다나 생가 앞에 짓고 있는 '시문학파 기념관'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제 우리 나라도 문학과 관련된 관광상품도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나 보다. 이러한 사업이 이 땅의 문학가들에게 큰 힘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생가의 안채인데, 마당의 좌우에 그 유명한 모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때가 늦어 화려한 모란꽃은 보지 못했지만, 잎이 떨어진 채, 무성한 잎사귀와 수북한 꽃대를 바라보며, 생전의 영랑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순수시를 지향했던 영랑의 문학사적 공과는 접어두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정시인으로 행복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내면에 들어가 내 마음의 아름다운 세계를 노래하노라면, 때로는 슬퍼지고, 행복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격정에 가득 차서 울부짖으며 시를 창조했을 것이다. 감히 일제에 맞서지 못하고 눈 감고 내면으로 도망쳐버린 현실도피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학 본연의 주옥같은 순수시들을 창작한 그의 업적은 우리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것일 게다.

 

생가 안의 좌측 끝에서 바라본 별당과, 안채, 행랑채. 선생은 안채에서 뚝 떨어진 별당에서 집필했었나 보았다.

 

덤불처럼 모란더미가 안채의 앞과 왼편에 무성하다.

 

생가에서 나오다 보니 골목에 영랑 문학관이 보였다.

 

방명록에 간단히 등재하고, 영랑관인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영랑관

 

 

영랑의 혼인사진인데, 13세에 결혼했다가 1년 만에 사별하고 23세 두번째로 혼인하였단다.

 

영랑관을 나와 청자박물관으로 가려다가, 시간에 쫓겨 장흥 방면으로 내달렸다. 가다가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를 정하기로 하고 앞길을 재촉하였다. 장흥 물축제가 한창이라는데,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물축제 이정표는 동쪽으로 가는 간선도로에서 퍽이나 멀리 떨어진 것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하늘은 땡볕에서 먹구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차창을 두들기었다.

 

김영랑(金永郞, 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 시인,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 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두어 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7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 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주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