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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상록수`의 모델 `최용신` 기념관

  안산시 전철역인 상록수역은 그 유래가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 선생의 활동지역이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상록수역의 유래를 듣고부터 최용신선생의 묘를 꼭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십 년도 훌쩍 지난 후에야, 비로소 찾아보게 되었다. 애석하게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아 상록수 역 부근에서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의외로 최용신 선생의 묘역엔 묘뿐만이 아니라 기념관까지 있었음을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샘골강습소 부근은 상록수공원으로 지정되어 인근의 아파트와 상가 건물 한가운데서, 겨레의 정신을 일깨우는 배움의 터로 새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문맹률 75%였던 시절(여자는 20명 중에 1명이 글을 아는 정도), 1930년 10월에 신교육을 받은 '모던 걸' 최용신이 낙후된 시골 마을인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사리' 샘물골(천곡-泉谷)' 강습소에 와서 농촌운동을 펼쳤다. 약 2년여 이곳에서 정열을 쏟다가 1934년 일본 고베여자신학교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4개월여 만에 병을 얻어 그 해 9월에 다시 샘물골로 돌아와 마지막 활동에 전념하다 1935년 1월 수원도립병원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고향이 원산이었던 최용신 선생은 병을 얻은 후에도 귀향하지 않고 천곡리로 돌아왔다가, 운명하면서 샘골 강습소의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 유언에 따라 강습소 가까운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반월공단이 개발되면서, 본래 샘골강습소 옆,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했단다.

  주민들과 인근의 유지들은 당시 25 세로 YWCA에서 파견했던 연약한 처녀교사의 죽음을 애도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참여한 사람들이 무려 1000 명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 "직녀성"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심훈은 자신의 연재소설 옆에 실린, 이 기사를 읽고 이곳에 찾아와 사실전후를 취재한 끝에 계몽소설 공모전 작품으로 "상록수"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상록수는 최용신의 활동에 소설적 허구가 가미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또 심훈선생은 소설 '상록수'로  당선상금 500원을 받았는데, 그 상금이 그의 창작활동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은 물론이었겠다.

 

  상록수공원 안의 최용신 기념관 전면(1층은 기념전시관, 2층은 샘골 강습소)

 

아래는 최용신 선생의 연표로부터 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을 받을 유족이 없어, 안산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기념관 준공 이후, 이곳에 전시하고 있단다.

 

 

 

 

기념관 2층, 건물 옆에 세워진 기념돌. 최용신 선생과 교류하던 유달영 등이 세운 것이다.

 

기념돌의 뒷면

 

최용신 선생이 손수 세웠던 샘골 강습소 주춧돌과 향나무

 

교회 앞에 세워진 5그루의 향나무, 최용신 선생이 직접 심은 나무인데, 심훈은 이를 보고, "상록수"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샘골강습소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된 기념관 2층, 지붕만 초가에서 기와로 바뀌었다.

 

샘골 강습소 현관

 

 

현관 벽에 붙여진 사진들...

 

 

 

현대적인 샘골 강습소 내부 - 오늘날의 안산시는 현대화된 대한민국의 또 다른 그늘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주 노동자들의 자녀들의 교육문제인데, 이들 다문화 가정의 교육을 이곳 샘골 강습소에서 맡고 있다고 한다. 문명사회 속에 현대의 제2 최용신 선생들의 활약이 기대된다.

 

강습소 앞에 세워진 심훈 기념비

 

 

최용신 선생의 유언과 심훈 기념비와 샘골 강습소, 그리고 샘골 교회.

 

강습소 오른쪽 아래에 있는 최용신 선생 묘

 

 

  최용신 선생의 유택의 왼편에 합장된 사람은 선생의 약혼자였던 김학준교수인데, 김학준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최용신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단다. 가족들이 처음엔 반대하여 다른 곳에 묻었다가, 얼마 후 고인의 유언을 받들어 최용신 선생의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약혼자였던 김학준은 처녀의 몸으로 죽은 최용신의 묘를 돌볼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묘 옆에 두면 자신의 묘와 함께 최용신의 묘도 관리해 줄 것이라 생각하여 유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학준의 후손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탓에 김학준은 최용신 선생 덕에 자신의 묘를 지켜가고 있다고 전한다.

 

논밭이었던 과거의 샘골은 아파트 숲으로 상전벽해가 되어 현대적 도시로 바뀌었다.

 

 

 

동산 아래에서 올려다 본 샘물교회(내부 보수 공사 중인 듯...)

 

 

 휴일임에도 자리를 지키다가 퇴근시간 무렵에 방문한 우리를 위해 최용신 선생의 활동과 생애를 설명해 주던 해설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설명을 듣는 내내 너무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그리고, 기념관 안에서 10여분 짜리의 동영상을 보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정성으로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무지를 일깨우셨던 최용신 선생, 그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에는 문명 퇴치율 세계 1위의 국가가 되었고, 국민 대부분은 대학까지 졸업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도처가 깨끗하지 못하고, 악취가 나는 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 풍요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정신적 빈곤과 갈등으로 자살률 세계 1위에, 행복지수 꼴찌라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을 부끄럽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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