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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궁예미륵을 모신 국사암

 

 쌍미륵사 언덕에서 내려오면서 포장도로가 오른쪽으로 휘어지고, 왼쪽은 차량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시멘트길인 작은 삼거리에 국사암 이정표가 서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을 줄 알고, 삼거리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국사암을 향해 걸었으나, 좁은 시멘트길이 끝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와 차를 타고 좁은 시멘트 도로로 조심스럽게 한참을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피할 공간도 없어 불안했으나, 국사암 주차장까지 탈없이 올라갔다. 차량출입금지란 팻말을 보고, 까맣게 보이는 올려다 보이는 국사암을 보고 걸어 올라가려니 맥이 빠졌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그 가파른 비탈길을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스쳐 올라갔다. 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차에 올라 비탈길을 오르는데, 그런 급경사는 처음 올라보는 듯했다. 어찌나 가파른지 자동차가 뒤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비탈길 위에 제법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문객도 많지 않을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아래 차량출입금지 팻말을 왜 세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절을 찾아다니며, 깨달은 일인데, 웬만하면 자동차를 제지할 때까지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편하다. 순진하게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올라가면, 그 안에 주차장이 또 있고, 그곳에 제법 많은 차들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차장이 가득 차서 주차할 곳이 없다면 몰라도, 누구는 밑에서부터 걸어오고 누구는 절 안까지 차를 타고 들어오는지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다. 스님들이 좋고 비싼 차를 타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스님이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등을 붙이고 지나가는 모습은 보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궁예미륵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은 국사암, 작은 암자로 생각했으나, 최근에 불사를 크게 일으켰는지, 규모가 제법 커 보였다. 고려의 역사에는 궁예는 포악한 왕으로 말년에 인심을 잃어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겨 도망하다가 백성들에게 돌을 맞고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운 왕건의 자손들이 궁예왕을 좋게 그릴 까닭이 없었겠다. 신라 왕자였던 궁예는 왕권 쟁탈에 희생이 되어, 갓난아기로 궁녀의 품에 안겨 이곳 죽산 칠장사로 망명도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세상으로 나갔다가 30세에 다시 고향인 죽주로 돌아와 미륵불을 세우고 뛰어난 의술과 인술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얻은 군대를 바탕으로 강릉으로 가서 양길의 무리들을 흡수하고, 개성까지 들어가 세력을 떨쳤지만, 신라사람으로서 옛 고구려 땅인 송도에서 그의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청주사람들을 동원하여 강원도 철원에 새나라의 기틀을 조성하고 그리로 천도하여 태봉국을 열었다.

 

 철원의 한탄강은 궁예왕이 강가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해서 한탄강이 되었으며, 포천의 명성산은 궁예왕이 그의 군사들과 쫓겨와서 죽게되자, 큰 산이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해서 울'鳴'자, 소리'聲'자 명성산이 되었다는 전설로 보면, 궁예왕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꼈던 임금이었던 셈이다. 오죽하면, 그가 젊은 시절 기반을 닦은 이곳 죽주에 그를 모신 미륵불까지 있을까 싶다. 역사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궁예왕은 미륵신앙을 신봉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꼈는데, 개성의 토호세력이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의 반란으로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휴전선으로 반반씩 나뉜 태봉국의 궁궐이 회복되면, 궁예왕과 태봉국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일어나리라 생각하며, 국사암 경내로 들어섰다.

 

 

초입에서 올려본 국사암, 오후시간이라 석양이 눈부셨다.


극락전과 대웅전


대웅전


바위에 새긴 동그라미.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해보았으나 알 수 없다. 원불교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대웅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계단석과 바닥의 돌들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


산신각대신 바위에 산신상을 새겼다. 깍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역시 세월의 풍상이 묻어야 진면목이 드러날 것 같다.


산신상 오른 쪽의 삼존 미륵불, 가운데가 궁예미륵불이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궁예 미륵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왼쪽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미륵은 지장보살, 가운데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공기를 들고 있는 미륵은 약사여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궁예불로 믿는 사람들은 왼쪽이 칼을 짚은 무신이고, 오른쪽은 무신과 대응되는 문신상이라고 한다. 이왕이면 궁예미륵이 그 흔한 관음보살보다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성시에서 세운 안내문. 

 


궁예미륵 오른쪽 언덕 바위에 새긴 석가여래불, 역시 최근에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석상이나 석조물은 고풍스러워야 아름다운 멋이 흐른다.

 


미륵불과 극락전, 대웅전, 산신상


내려오는 길에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 보았다.


주차장에서 올려본 국사암

 

 

국사암은 도솔산 쌍미륵사 가까이 있지만, 국사봉이라는 더 높은 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궁예미륵을 모셨다면, 당대의 이름 없는 백성들도 궁예가 세운 쌍미륵불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 바라보아야 그 격이 맞다고 생각했을 성싶다.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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