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山寺

직지사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단다.  절이름을 직지(直指)라 한 것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해서,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고,  또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신라시대 창건하였으나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중창되었고, 현 건물은 영조 11년(1735)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대웅전의 현판은 이완용의 글씨라는 거였다.http://cafe.naver.com/hanbaedal/163

 

대웅전 탱화 안내문

 

후불탱화는 영조 20년에 조성되었는데, 중앙에 석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약사 불회도(藥師佛會圖), 아미타불회도(阿彌陀會圖) 3점은 모두 보물 670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며,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이곳의 관음보살님은 반가부좌의 모습으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내재해 있음을 나타내는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  

 

비로전 내의 천불상은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르며,  불상의 재료는 경주 특산인 옥돌이란다.  이 천불상 한 가운데 동자상이 있다. 

 

청풍료는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신축(1966.4.1~1971.11.30)되었는데,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 건물이다. 이 건물은 현재 본사의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라는데, 방문했을 당시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안의 내용은 볼 수 없었고, 단지 눈내린 황악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이 건물 뒤쪽으로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태실이 있다고 한다. 

 

 

  직지사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사실도 놀라울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온 우리의 불교도 일제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이야기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왕궁의 존엄을 훼손하기 위해 사찰의 본당을 대웅전으로 이름지었다는 것에대한 불교계의 성찰은 아직까지도 왜 없는 지 모르겠다.  조선시대까지 금당이나 법당이라고 했다면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내리고 다시 금당이나 법당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수많은 사찰 대부분이 본당을 대웅전이라고 명명한다는 것은 켜켜히 쌓인 피부의 때를 닦아내지 않고, 그 위에 비단을 두르는 일과 진배 없는 일이겠다.

 중국에 의해, 일제에 의해, 김부식 같은 사대사학자, 이병도 같은 친일사학자들에 오염되고 훼손된 우리 역사가 어디 한 둘일까마는 세계 속에 우뚝 솟은 자립국가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주권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山寺'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주사  (5) 2010.08.08
안성 청룡사  (2) 2010.07.10
서산 부석사  (4) 2010.07.02
운길산 수종사  (4) 2010.06.03
봉화 청량사  (4) 201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