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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강릉 경포호 바로 아래의 조선시대불우한 천재 문필가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생가를 찾았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라 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깊을 텐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우연히 작년에 1박 2일에 소개되어 몹시 궁금했었다. 허균은 뛰어난 문장가로서 그의 인생편력이 매우 다채롭다. 벼슬길에 나가 기행과 파격으로 부침을 거듭하다 50세에 역모죄로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된 사형수이기도 하다. 허균의 누나인 난설헌은 뛰어난 문장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명성이 높았던 재원이기도 했다. 15살에 안동 김씨 성립과 혼인했으나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아들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피눈물로 한 많은 세상을 살다 27살에 요절한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이 지었다는 조선시대 한 많은 여인의 노래인 규원가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서도 슬픔 속에서 그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원망과 한이 담겨 있다.

 

 허균과 그의 형 허성(1548-1612), 허봉(1551-1588), 아버지 허엽(1517-1580)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맹골마을에 있다. 본래 이 묘들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곳이 도시개발이 되면서 이곳에 이장한 것이라 한다. 한편, 허난설헌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에 있다.

 

남쪽 끝지점에서 바라본 생가

 

서쪽 대문, 서문이 정문만큼이나 크다.

 

 

서문에서 들어서면 만나는 바깥채, 바깥채와 안채는 담으로 분리되어 있다.

 

허난설헌이 기거했을 안채, 안채 끝 방에 허난설헌의 초상이 걸려 있다.

 

허난설헌 초상

 

북서쪽 끝점에서 바라본 뒤 뜨락

 

북동쪽에서 바라본 뒤뜨락

 

남동쪽 끝지점에서 바라본 안채 마당

 

생가의 남쪽에 마련된 허균 난설헌 시비공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러운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도깨비불 무덤에 어리 비치네/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아무렴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배속에 아기를 가졌다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는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허난설헌 동상 앞에 새겨진 작은 돌조각 위에 새겨진 자식 잃은 어미의 애절한 "哭子(아들 딸 여의고 통곡하며...)"란 시이다. 한 많은 그녀의 노래 속에는 배속에 잉태한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데, 그녀의 염려대로 그 아이마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시공원 아래에 있는 허균 난설헌 기념관


기념관 내부의 안내 데스크


허균 일가

 

 

 


허균의 방

 

 

 

 

 허난설헌 :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엽(曄), 오빠는 봉(篈), 남동생은 균(筠)이다.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가문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엽이 첫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 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과 혼인해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조선사회의 모순과 계속 닥쳐온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된다. 그만큼 신선사상에 심취했으며 삶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한문가사로는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됐다고 전한다. 한편, 동생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고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인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해 일본 열도에서도 애송됐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허균 :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과 난설헌(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 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 지 6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접사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선조 37)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대북(大北)에 참여하기도 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 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1617년 12월 정책 입안의 총책임자인 좌참찬 자리까지 오르며 왕의 신임을 받던 허균은 자신이 1612년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되자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무력으로 왕궁을 점거해 권좌에 있던 양반 귀족들을 몰살시킨다는 계획 아래,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외적이 침입했으니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라”는 격문을 붙였는데, 불심 검문에 걸린 부하 현응민이 고문에 못 이겨 궐기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허균 또한 체포당하고 말았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사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그러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서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25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성소부부고』에 함께 실려 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저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현재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