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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홍사용문학관

 잔뜩 흐린 하늘에 겨울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는 가운데 화성시 동탄 신도시 초입에 있는 홍사용 시인의 문학관을 찾았다. 진작부터 방문하고자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던 터였다.

 홍사용 시인은 이곳 동탄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100일 만에 무관학교 1기에 합격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재동으로 옮겨 살다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시 화성으로 이사하여 17세 때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철유(哲裕)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 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간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동탄 신도시에 있는 홍사용 문학관

 

입구에 있는 연표

 

삶의 이력, 출생과 문학 활동, 그 이후의 삶을 요약 기록해 놓았다.

 

한국 근대시문학사와 홍사용의 시.

 

 

청마 유치환의 추모시

 

조지훈의 추모시

 

노작의 대표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이 주동이 되어 박종화(朴鍾和)·정백 등 휘문 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曙光社)에서 ≪문우 文友≫를 창간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中)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1922년에 문예지 ≪백조 白潮≫와 사상지 ≪흑조 黑潮≫를 기획하였으나, 1923년 9월까지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동명 東明≫·≪여시 如是≫·≪불교≫·≪삼천리≫·≪매일신보 每日申報≫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묘장 墓場>·<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붉은 시름> 등 수편이 있다.

 

육필 원고

 

 

1923년 신극운동으로 '토월회'에 참여하였다. 토월회의 문예부장직을 맡으면서 서양극을 번안하거나 번역, 연출까지 하며 신극운동에 참여했다.

 

홍사용의 시들......

 

시문학관 오른쪽에 있는 시(詩)가 있는 공원.

 

 

 

1930년대에 들어서 5년간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5년간 방랑생활을 하며 불교지에 희곡 '벙어리 굿'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세검정에 정착하여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41년 이후 강경, 전주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학교에 잠시 출강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하여 청년운동을 하려 했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1월 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사용(1900-1947) 호 노작(露雀). 수원(水原: 현재의 화성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1922년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했다.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참여하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었고 희곡도 썼다. 시·수필·희곡 등 발표 작품은 많지만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은 없고 《백조》의 간행과 극단운영에 가산을 탕진한 후에는 가난 속에서 살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그 밖에 《꿈이면은》, 《봄은 가더이다》 등의 시작품이 알려져 있다. 시인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와 후손의 후원으로 2002년 노작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출처] 홍사용 [洪思容 ] | 네이버 백과사전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만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만….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만,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만….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라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 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스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 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 나흘 날 밤,
맨재텀이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짧은가 보려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 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너 산 산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좇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로 가던 한식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1923. 9월. 백조 3호>

 

*시왕전 :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

*감중연 : 양택풍수 이론에 나오는 말. 8괘 중 6감수, 감괘는 가운데 효만 연결되어 있어 감중연이라 한다. 중남(中男)의 의미. 본문에서는 '무심하게 다른 척하는'의 의미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

 

태어날 때, 고통에 터트렸던 고통의 울음이, 유아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눈물로, 열한 살 소년시절에 눈뜬 자의식에 망국의 설움을, 어머니의 품에서 눈물로 담담하게 쏟아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외아들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을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눈물을 나라 잃은 망국민의 슬픔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백조의 시풍답게 감상적 어조의 독백으로 나라잃은 민족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를 위해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는 홍사용, 밤새워 술을 마셔도 몸가짐에 흩어짐이 하나도 없었다는 꼿꼿한 기개로 <백조> 등 문예지 발간과 문예 활동에 가산까지 탕진했다고 한다. 일제의 가혹한 억압아래 붓을 꺾고 한 때 방랑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문학활동과 거리가 먼 한의사로서의 궁핍한 삶을 살았다. 해방 후 다시 문학창작의 불을 지피려 했을 때는 이미 지쳐버린 심신에 병마가 깃들었다. 결국, 나라 찾은 기쁨을 그의 글로써 표현하지도 못한 채 민족주의자 홍사용은 영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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