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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동구릉

 

 조선의 역사를 실감할 수 있는 곳, 동구릉을 찾았다. 동구릉은 한양의 동쪽, 즉, 구리시에 조선왕조의 아홉 릉이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왕릉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맞아 국가의 위기를 맞았던 제14대 선조의 목릉, 당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근대화의 불씨를 지폈던 제21대 영조대왕의 원릉과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의 아버지 문종의 현릉들이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는 길을 검색하니 잠실역 6번 출구에서 1115-6버스를 타면 입구까지 갈 수 있단다. 잠실역 6번 출구 앞에서 막상 버스를 타려고 하니까, 기사님이 승차장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초행길이라 태워준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승차장소는 잠실역 9번 출구 앞이란다. 환승지에서 버스를 타려면 노선별 승차장소가 복잡해서 찾아다니기 힘들다. 복잡한 환승장에는 종합적으로 버스승차 안내를 해주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걸 마다하는 행정가들의 자세가 아쉽다. 출근 시간 이후라 버스 안은 매우 한산했다. 버스 기사님이 어찌나 친절한지, 3-40분여를 기사님과 이야기하면서 동구릉까지 갔다. 동구릉에서는 문화재청 50주년 기념행사라며 26일부터 10월 2일까지 입장료 1000원을 무료로 개방했다. 입구의 안내소에서 안내 카탈로그를 얻어들고, 안내도 순서에 따라 나홀로 탐방에 나섰다. 날씨는 쾌청, 햇빛도 그리 뜨겁지 않아 걷기에 쾌적한 날씨였다.

 

제일 먼저 맞은 것은 홍살문이었다.

 

 

나뭇잎들이 벌써 가을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재실과 능관리소가 있는 4거리인데 좌측으로 가면 혜릉과 숭릉이었는데, 안내서의 순서대로 큰길 따라 직진하며 탐방하기로 했다.

 

고목과 재실

 

 

1. 수릉-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왕후릉 - 능침 2개의 합장묘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 시절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등용하고 선정을 펼치려 했으나 2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었다가, 고종 때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1808∼1890)는 조만영의 딸로 12세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후사 없던 아들 헌종에 이어,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전부터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조카인 조성하(趙成夏)와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즉각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한, 안동김씨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66년(고종 3) 2월까지 계속 수렴청정을 하며 관리 탐학 방지, 진휼(賑恤), 황해도 도장(導掌) 폐해 엄금, 공폐(貢弊) 제거 등을 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흥선대원군에게 모든 정권을 잡도록 하교한 바가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가 정치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효도를 다하였으나, 그 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질투를 두려워한 대왕대비가 고종을 피하였다. 또한, 친정 세력들을 대거 기용하였지만, 그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가문이 쇠락해지고, 더욱이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유치원유아들이 소풍놀이가 한창이었다.

 

 

2. 현릉 - 문종릉과 현덕왕후릉 -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둔 독립묘 2기

 

문종은 세종대왕의 맏아들로, 1450년 왕위에 올랐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2년 만에 39세로 승하하였다. 단종의 아버지이며, 수양대군의 형이다.

현덕왕후는 세자궁에 궁녀로 입궁하여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가 1437년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페위되면서 세자빈으로 승격되었다. 1441년에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되었다. 정자각 뒤가 문종릉인데, 현덕왕후는 문종릉과 작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워 있다.

조선초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어 수렴정청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욕심 많은 수양에게 왕위찬탈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자각 뒤의 문종릉

 

문종릉과 골짜기 하나 사이 거리의 현덕왕후릉

 

 

3. 건원릉 - 태조릉- 독립묘

 

쿠데타로 1392년 개성에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하며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아들들의 권력쟁탈로 만년에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계비였던 강씨 소생인 두 아들을 한씨 소생 막내아들인 방원에게 잃고 나서, 왕위를 팽개치고는, 한때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며 살기도 했다. 말년에는 계비와 두 아들의 명복을 빌며 불도에 힘쓰다가 1408년 창덕궁에서 74세로 승하했다. 한씨 소생의 막내아들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좌에 오른 방원 태종은 그 아버지를, 강씨의 묘인 정릉에 안장하지 않고 이곳에 모셨다. 봉분 위에는 고향의 갈대를 심으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잔디를 심지 않고 함흥에서 갈대를 가져다 심었다. 죽어서 태조 이성계는 고향의 갈대를 이고 홀로 이곳에서 지내야만 했다.

 


능 아래 비각 안에 비석 두 개가 있다. 오른쪽 비석은 대한제국 때 건립한 것으로 태조 고황제로 추존하여 세웠다.

 

왼쪽은 왕릉을 만들며 세운 신도비로 태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 후면 해설문

 

 

4. 목릉 -선조릉, 의인왕후릉, 인목왕후릉 - 같은 방향의 독립묘 2기와 맞은편 독립묘 1기

 

조선 제14대 선조대왕(1552~1608)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심한 당쟁으로 정치는 불안정했고, 임진왜란까지 겪어 조선 사회를 엄청난 혼란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의인왕후는 선조 2년 왕비에 책봉되고 가례를 올렸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인목왕후는 1602년에 19세 때, 51세인 선조의 왕비에 책봉되어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그 아들은 이복형인 광해군에 의해 귀양지에서 시해되고 말았다. 왕후는 광해군 때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올랐다.

정자각 뒤가 선조, 오른쪽이 원비 의인왕후의 능이다. 인목왕후능은 맞은편에 있다.

 

선조의 능

 

원비 의인왕후의 능

 

맞은 편의 인목왕후릉

 

 

5. 휘릉 - 장렬왕후릉 - 독립묘

 

장렬왕후(1624~1688)는 1638년(인조 16년) 15세에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65세로 돌아갈 때까지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 4 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휘릉에서 원릉으로 가는 길

 

 


6. 원릉 - 영조와 정순왕후릉 - 능침 두 개의 합장묘

 

영조(1694~1776)는 제19대 숙종의 넷째 아들로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은 1724년부터 1776년으로 52년에 달한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폐해를 없애는데 노력하며, 선정을 위해 힘썼고, 조선왕조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른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 35년 15세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김한구의 딸로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어서,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던 사도세자와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이 컸다.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등도 처형하였다.

다음 해에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김관주 ·김일주 ·김용주 및 영의정 심환지 등이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純祖)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드라마 '이산'에서 그 성격이 드러나 보이기도 했으며 조선왕조 몰락에 일조한 인물이다.

정자각 뒤에 영조의 능침과 정순왕후의 능침이 사이좋게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봉분을 올린 언덕이 높아서 아래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7. 경릉 - 헌종릉, 효현왕후릉, 효정왕후릉 -능침 3기의 합장묘

 

헌종(1827~1849)은 요절한 문조(효명세자)의 아들로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왕위에 올랐다. 15세까지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순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재위 기간은 15년이다.

효현왕후(1828~1843)는 김조근의 딸로 1837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정왕후(1831~1903)는 홍재룡의 딸로 효현왕후의 뒤를 이어 1844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부터 헌종릉, 효현왕후릉, 효정왕후릉이 나란히 앉아있다. 가까이서는 봉분이 보이지 않아 멀리서 촬영했다.

 

 

8. 혜릉 - 단의왕후릉 - 단독묘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1686~1718)의 능이다. 1696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되었다.

경종은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이며,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이다. 1690년(숙종 16) 송시열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은 노론의 지지를 받고 그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1717년 대리청정하였으나, 그해 숙종이 몰래 노론의 이이명을 불러 세자가 무자다병(無子多病)함을 이유로 그의 즉위 후의 후사는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한 일이 있어 노 ·소론이 크게 대립하였다. 1721년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한 뒤 다시 노론이 그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간하는 소론 이광좌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친정(親政)하였는데, 김일경의 탄핵으로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김창집(金昌集) ·이이명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 등의 노론 4 대신을 유배보냈다. 1722년 노론이 시역(弑逆)하고 이이명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유배 중인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하는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중심의 정권은 노론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벌여서 그의 재위 4년 동안은 당쟁(黨爭)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9. 숭릉 - 미공개

 

조선 제18 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현종(1641~1674)은 17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을 때 청나라에서 태어났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은 1659~1674.

명성왕후(1642~1683)는 김우명의 딸로 효종 2년 1651년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1659년 현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숙종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 공주를 낳았으며, 1683년 12월 5일 창경궁의 저승 전(儲承殿)에서 42세로 죽었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았다.
명성왕후는 성품이 과격하며 정치에도 자주 참여했는데, 남편인 현종조차후궁을 한 명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명성왕후는 삼복의 변이라고 인평대군의 세 아들들(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을 궁녀와 간통했다고 무고하여 죽게 하기도 했다. 이후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이 사건으로 큰 망신을 당하고 두문불출하다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후는 더욱 남인들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희빈 장씨는 남인계 인물이라 나인 시절 숙종과 정분이 났을 때,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명성왕후가 돌아간 후에 숙종은 쫓겨나간 장씨를 궁궐로 다시 불러들이게 했다. 인현왕후는 같은 서인계열이라 별다른 절차 없이 왕비로 간택했다고 한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동구릉 출입구바로 안, 우측에 있는 역사문화관인데, 조선왕조 연표와 동구릉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여, 영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동구릉 입구

 

 

동구릉 안내도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왕릉은 살아있는 자료처럼 생각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왕의 능 하나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9기의 거대한 왕릉들은 거대한 유물창고처럼 많은 꿈속의 이야기들을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이었기에 숨어있는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도 많을 것이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라도 들었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나홀로 탐방이다 보니, 안내서와 인터넷에서 찾아낸 자료들에 의존해서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멀리서만 바라보니, 능 앞에 세운 석물과 능 전체를 조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릉에 다녀왔으나, 생생한 느낌은 가질 수 없는 안타까움이 매우 컸다. 여주의 영릉처럼 봉분 근처까지 올라가서 볼 수 있는 탐방로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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