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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명성왕후 생가

 날 맑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여주에 있는 명성왕후 생가를 찾았다. 비운의 왕후, 명성왕후 생가는 여주 나들목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주 나들목을 빠져나가자마자 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해서 700m 정도 달리면 바로 왕후가 태어난 곳이었다. 생가에 도착하기 전에 커다란 고택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생가인줄 알고 담벽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들어갔다. 들어가려다 보니 매표소가 있었는데, 생가는 100m 정도 더 가야 한단다. 주차료 1000원, 입장료 1인당 1000원을 지불하고 고택 먼저 들렸다. 처음 보았던 고택은 감고당이란 현판을 대문 위에 걸었다. 고택의 대문 앞에 흙더미가 쌓여 있어 전경사진은 생략했다.

 

 

1. 감고당(感古堂 )

 

 

 조선시대 제 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 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감고당(感古堂)'이란 이름은 영조대왕이 붙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여주에서 태어나, 8세 때 홀어머니를 따라 이곳으로 이사와 살던 민자영은 1866년(고종 3) 1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군의 명성왕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군 명성왕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종합하자면 명성왕후는 인현왕후 집안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여주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홀어머니를 따라 6대조 민유중의 서울 안국동 감고당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따라서 여주의 생가는 왕후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서울 안국동 감고당은 소녀시절을 보내다가 왕비로 간택받았던 집이다. 생가 복원 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해체하여 이곳에 옮기게 되었다.

 

후문으로 나와 명성왕후 생가로 가면서 뒤돌아 본 감고당

 

2. 기념관

 

감고당에서 걸어 나와 왕후의 생가로 갔는데, 공원처럼 조성되어 보기에 아름다웠다.

 

정면이 명성왕후 기념관 오른쪽이 문예관이다. 애석하게도 문예관은 휴관 중이었다.

 

기념관 현관 맞은 편,정면 벽에 그려진 고종황제와 왕후의 초상화. 기념관은 'ㅁ' 자 형으로 전면에만 지붕을 얹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쪽 특별전시관에서는 순종황제 국장식 사진들이 있었다. 왕후의 기념관은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돌아 나오는 구조였다.

 

 명성왕후 시해당시를 그린 그림.

 내 기억으로는 경복궁 건천궁이 복원되기 이전, 시해 장소에 걸려 있었던 그림 같다. 건청궁이 복원되면서 사라졌는데, 이 그림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그림 아래에는 명성왕후를 시해했던 일본 낭인의 칼이 복제되어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토오 가쯔야키가 명성왕후 시해당시에 사용했던 칼을 복제한 것이다.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조선의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어버리다")라는 글귀가 칼집에 새겨져 있다. 작전명 "여우사냥"을 성공한 직후, 토오 가쯔야키가 새겨 넣었다고 한다.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최초로 난입한 세 명 중 하나이다.

 칼은 손잡이나 칼집에 요란한 장식이 없는 시라사야 상태의 히젠도이다. 히젠도는 시라사야(옻칠 등의 가공을 하지 않은 후백나무로 칼집과 자루를 만들어 보관하기 위한 칼)를 보존하기 위하여 검을 분리하여, 칼 날을 색이나 기타 장식물로 치장하지 않고, 나무 칼집과 나무 손잡이로 조립해 둔 칼이다. 통풍이 잘 되어, 장기 보관용으로 만들어 놓은 보관용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이 칼은 전체 길이 120㎝에, 칼날 부분이 90㎝ 길이이다 .16세기 에도 시대에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으로 알려졌다. 칼은 메이지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가 신사에 기증한 것이다.

 일본의 문인 쓰노다 후사코의〈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이 있다. 그중에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키, 나(데라사키)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또,“나카무라 다테오가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왕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야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라는 말하고 있다.

 

 토오 가쯔아키는 왕비의 침전으로 최초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킨 가장 유력한 사람이다. 훗날 토오 가쯔아키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면서, "황후를 베었을 때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며, 칼을 신사에 맡기고 “이 칼이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다음은 명성왕후 시해 당시 있었던 목격담들의 기록이다.


 왕비시해 공격조였던 고바야카와의 증언 :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한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여인은 금방 잠자리에서 나온 듯 짧은 흰 속적삼을 입고 있었고, 아래에는 흰 속옷을 입었으나 무릎아래는 흰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가슴과 양쪽 팔꿈치까지 노출된 채 반듯이 누워 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한 얼굴과 흰 살결이 스물대여섯 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녀는 죽었다기보다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가냘픈 손으로 팔도를 움직여 군호를 다스렸던 왕비. 바로 그 여인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로 극도의 처참한 광경이었다. 왕비의 이마에 교차로 난 두 개의 칼날 자국이 치명상이었던 것 같았다.


 사바틴의 증언 : 흉도들의 난입을 막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일본군 소위 미야모토가 쏜 총에 허리를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순간, 낭인 하라야마 이와히코가 다시 칼로 베어 살해했다. 자객들은 궁녀 중에서 가장 옷차림이 그럴듯하고 왕비처럼 보이는 세 여자를 끌어내어 마루에서 무자비하게 칼로 베어 버렸다. 칼에 맞아 절명상태에 빠져있던 왕비가 의식을 되찾아 실낱 같은 목소리로 '왕세자는 안전한가'라고 물었다. 그때, 자객이 달려들어 왕비를 마구 짓밟고 칼로 거듭 찔렀다. 그 후 시해범들은 방안의 궁녀를 하나씩 끌어내어 왕비의 시신 여부를 확인시켰다.

 흉도들은 석유를 끼얹고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질렀다. 시신이 모두 타고 검은 뼈 몇 조각은 우범선의 지시에 의해 윤석우가 일부 땅에 묻고, 나머지 잔해는 옆에 있는 향원지 혹은 근처의 우물에 버렸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 명성왕후는 그렇게 세상을 하직했다.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두 문은 일본군이 보초를 선 채 차단하고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대략 40여 명의 조선군 훈련대가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정렬해 있었다. 그들 앞뒤에는 일본장교들이 제복 차림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이 방의 안팎을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

 

- 이 사건을 검토한 영국 영사 힐리어는 40여 명의 조선 훈련대는 위장한 일본인들이었음을 밝혔다.

 

 복제된 칼 옆에 있는 일본인 사죄방문단(이들 중 2 명이 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낭인의 후손)의 사죄 방문록과 그때의 사진.

 

전시관 내부 - 가운데는 '아! 옥호루'로 건청궁 옥호루에서 왕비가 시해되었던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하여 보여주었다.

 

 

3. 왕후의 생가

 

 

생가 안 마당에서는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대청마루

 

 어린이들이 떠난 후, 안방과 대청마루 그리고 사랑

 

생가의 뒤뜰

 

뒷문으로 나오면서 들여다본 생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1630-1687)의 신도비인데, 비석 받침의 거북머리가 머리를 돌려 무덤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무덤은 거북 머리 방향으로 150m 거리에 있다.

 

 왕후의 생가와 감고당 사이의 체험학습장과 장터. 잔치국수를 한 그릇에 1000원씩 팔고 있었다. 이곳에서 얻은 수익금은 불우 이웃을 위해 사용된단다. 요즘 세상에 1000원짜리 식사로 관람객들의 편의를 생각하는 뜻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명성왕후(1851~1895)는 비극적인 조선의 종말을 예고하는 비운의 왕비였다.

 

  출생과 간택 경위


 명성왕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다. 명성왕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왕후 집안은 당색으로 서인계였고 아버지 민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왕후가 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왕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 감고당이란 이름은 영조가 지어주었다)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꽤 넉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왕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명성왕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씨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 부인은 바로 당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였다. 부대부인 민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의 누나였다. 그녀는 둘째 아들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명성왕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대원군은 명성왕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경계하던 대원군은 가문으로는 그다지 빠지지 않으나 주변에 힘이 될 사람이 별로 없는 명성왕후를 전격적으로 왕비로 간택했다. 물론 제대로 된 왕비 간택 절차를 거쳤지만, 이 간택 절차 이전에 대원군은 이미 아비 없고 남자 형제 없는 민씨가의 외로운 처녀를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다.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과의 갈등


 그러나 대원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총명했던 명성왕후는 대원군의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양 오빠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고종의 맏형)까지도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고 고종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친인척을 모두 끌어들인 후 명성왕후는 대원군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난 안동김씨 세력과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해 주었지만 결국 반목하게 된 풍양 조씨 세력까지 끌어들였다. 사방에서 대원군이 운신할 범위를 점차로 좁혀 나갔던 것이다.

 

 명성왕후가 처음부터 대원군에 맞서는 지략적인 정치가였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명성왕후의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감정적인 대립도 한 몫하였다.

 

 16세의 나이에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신혼 초부터 여성으로서는 쓰디쓴 질투의 감정을 맛보았으며 이를 시아버지 대원군이 부추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명성왕후와 혼례를 치를 무렵 고종은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상궁출신 궁인 이씨를 매우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정작 정식 왕비인 명성왕후는 냉대했던 것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인 이씨가 아들 완화군을 낳자 궁중의 관심은 모두 궁인 이씨에게로 몰렸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명성왕후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다. 대원군은 배경 없는 왕비를 며느리로 들인 것도 모자라 혹시나 외척이 발호하는 것이 두려워 신분으로나 가문으로 아무것도 기댈 데 없는 궁인의 자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외척에게 시달리지 않고 왕권을 더욱 오로지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원군의 완화군에 대한 성급한 세자 책봉 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명성왕후는 시아버지 대원군의 의중을 알아보았고 자칫 자신은 허울만 좋은 찬밥 신세 왕비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이후 고종의 사랑을 회복한 명성왕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원군의 원자에 대한 무리한 약 처방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국정부터 왕가의 가정생활까지 간섭하며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했던 대원군의 독단적인 태도는 결국 명성왕후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즈음 왕위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어 성인이 된 고종도 더 이상 전제적인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 없이 자신이 왕인 나라를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대원군이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외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거듭된 실정이 왕의 친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명성왕후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했다.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고종은 친정 직후 대원군 집권 때의 쇄국을 풀고 일본과 수교하였고 이후 차례로 서양의 열강들과 수교를 맺어 나갔다. 그러나 이전의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미처 외세에 대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개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국 이후 내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대원군과의 대립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외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자 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과 명성왕후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하면서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 와중에 1882년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이 터지고 명성왕후가 힘을 기르기 위해 키웠던 민씨 세력이 위협당하자. 명성왕후마저도 그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 은거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은 대원군은 명성왕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국장까지 치르려고 하였다. 이때 명성왕후는 고종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명성왕후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씨들의 힘을 모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청의 개입으로 더뎌진 개화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명성왕후는 더욱 청나라와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후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신하들과 아버지(대원군)에게조차 권력에 도전을 받은 고종은 명성왕후와 더욱 밀착되었고 모든 국정을 그녀와 의논하였다. 특히 외교적인 문제는 명성왕후와 거의 뜻을 같이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사리판단이 비교적 명확했던 명성왕후였지만 목숨마저 위협받은 환란을 겪은 후 그녀는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강렬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하는 등 국고를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살해당한 왕비, 훼손된 국격

 

 명성왕후에 대한 외국 측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그녀가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고 쓰여있다.

 

 19세기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왕후를 알현한 후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명성왕후에 대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 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기에, 또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명성왕후는 정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변은 늘 불안했다.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치욕의 을미사변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 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던 명성왕후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은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 요소로 왕비였던 명성왕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왕후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하였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되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이다.

 

 평가

 

 명성왕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그녀가 망국의 왕비로서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까지 참으로 극단적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아마도 19세기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 운영의 다양한 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쇄국 정치에 반대하여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나라를 열었지만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의 불만을 샀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그녀의 친정이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등 시대를 역행했다는 것이 주요한 비판의 이유였다. 한편에서는, 똑같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명성왕후가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으며,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이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고 이것이 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876 네이버캐스트

 

 사족 : 명성왕후의 공과를 떠나, 황후시해사건은 약소국 조선 위정자들의 무능함과 국방력의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이다. 임진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을 수 없던 조선왕조의 부패와 무능력이 오늘에 이어지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엄청난 국방비를 쓰고도 자주국방을 이루지 못한 채, 부끄러움도 모르고 미군에 의존하려는 우리 현실이, 그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명품 무기라고 자랑했던 고가의 장비들은 불량품들이었고, 국방비를 빼먹는 파렴치한 무기공급업자들은 인오군란 때 군량을 등쳐먹던 부패 관리들과 다를 바가 없다.  부디 우리 정치가들은 현실을 직시하여 외세를 경계하고, 우리의 자주적 힘을 키워야, 우리가 살고,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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