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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안성 칠장사

  봄기운이 완연한 일요일,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의 배경이기도 한 안성 칠장사를 찾았다. 십몇 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라 옛 기억을 떠올렸는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륙에 있는 탓인지, 봄기운이 늦은 감 있었는데, 가족들과 나들이 오신 관람객들이 의외로 많았다.  고려 때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니 이들은 일심정진해 도를 깨달았기에, 산이름은 칠현산, 절이름은 칠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 옆의 일주문. 일주문 옆에 도로가 나 있어 웬일인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절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근년에 지어진 듯하지만 소박한 모습이었다.

 

 

  일주문 바로 위의 천왕문이다.

 

  대웅전 좌측 건물 벽화. 태봉국의 궁예왕이 13세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특히 활을 잘 쏘았는데, 그래서 이름이 궁예란다. 궁예는 이 부근 죽주산성에서 인심을 얻고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기반을 넓혀갔다.

 

 

  대웅전 앞에는 초파일 연등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웅전 오른쪽 귀퉁이에서 개가 손님들을 맞았다. 개 이름이 '해탈'이다. 가까이 다가가도 물끄러미 쳐다볼 뿐 짖지 않았다. 해탈이라도 한 듯이 방문객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석불입상이다. 다른 절터에 있는 것을 옮겨 왔다.

 

  대웅전 내부의 삼존불이다.

 

  대웅전 마당에 3층석탑을 에워싸고 연등들이 봄바람에 나부꼈다.

 

  90년대 서울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임꺽정"을 이곳에서 촬영했다는 흔적의 표시로 출연배우들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았다. 그 무렵 월북작가 홍명희의 임꺽정이 해금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임꺽정 이야기의 벽화. 이곳에서 임꺽정은 그의 무리들과 함께, 갖바치였던 병해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갖바치는 백정출신으로 노년에 칠장사에 들어와 법명을 병해라 하고 생불의 덕성을 갖추게 된다. 그는 칠장사에서 중생들을 교화하며 가죽신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안성의 가죽신이 유기와 함께 안성 특산품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임꺽정은 대사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 인연으로 칠장사를 그의 정신적 의지처로 삼게 되었다.

 

 대웅전 위에 있는 혜초대사 국사비와 나한전이다. 왼쪽에 있는 나한전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와 얽힌 얘기가 있다. 천안사람인 박문수는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 절에 들려 과거급제를 빌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날 밤 꿈에 나한부처님이 나타나 시제를 가르쳐 주었다. 그 덕에 박문수는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도 각종시험에 고득점이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앞의 유리방 뒤에 지붕만 조금 보이는 곳이 나한전이다.

 

  국사비 쪽에서 내려다본 가람으로 그 규모가 작았다.

 

칠장사를 떠나며 뒤돌아서 전경을 한 폭에 담았다.

 

  이외에도 칠장사는 조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와 인연도 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때 폐서인 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자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자주 찾았다. 그때 인목대비가 쓴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과 자신의 한스런 심정을 토로한 시가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전해오고 있다.

 

  크지 않은, 작고 아담한 절이지만 이곳 칠장사에는 서민들의 삶과 관련이 많은 듯싶다. 가난 때문에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민중들의 고통을 안고 있는 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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