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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영월 청령포와 장릉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는 여기서 단종이 돌아간 줄 알았었는데, 이곳에서 지낸 것은 1457년 6월부터 두 달이었다고 한다. 유배 중 여름 장맛비에 청령포가 범람하자, 영월읍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겼다가, 그해 10월에 그곳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17살, 어린 소년이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지형으로 유배지의 전형이었다. 나루터에는 청령포를 건너는 배 두 척이 여행객을 맞아 좁은 강폭을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넌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의 넓지 않은 강이었다. 동력선이 방향을 바꾸어 건너편에 접안하는 시간이 오히려 지루할 정도로 강폭은 좁았다.

 

영조대왕이 친필로 썼다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이다. 단종이 머물던 없어진 집터에, 이곳이 단종의 어소였음을 이 비석이 알리고 있었다.

 

2000년에 승정원일기에 따라 단종어소를 복원하고, 그 안에 밀랍인형을 두었다. 갓을 쓰고 앉아있는 분이 바로 단종이다.  인형이 다소 조잡해 보여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단종어소 밖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인근에는 단종의 행적을 지켜보고 애끓는 목소리를 들었다는 '관음송'이 있다. '관음송'은 볼 '觀', 소리 '音', 소나무 '松'으로 단종의 거취를 지켜본 역사적 소나무란 뜻이다.

 

단종어소를 지나, 단종이 한양을 그리며 올랐다는 노산대.  절벽 위에 올라 서족을 향해 고개를 빼든다고, 한양이 보일까마는,  제왕의 신분에서 쫓겨나 목숨까지 위협받는 단종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짐작이 갔다. 그 애절함이 이 자연 속에 녹아 있는 것 같았다.

 

노산대 아래에는 무심한 겨울 오리 떼만이 한가롭게 오락가락 노닐고 있었다.

 

노산대를 향해 뒤돌아 보니, 높은 절벽이 세상과 격리된 지역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저 뒤쪽으로 오른쪽에는 기차가 다니는 철교가 있다.

 

'청령포금표'비.  단종의 유적인 이곳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이른바, 출입금지푯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서로는 100척, 남쪽으로는 490척까지 통행을 금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청령포 안내도

 

청령포에서 돌아가는 길, 강 건너엔 험한 산세에도 불구하고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겨울철이라 더욱 쓸쓸한 풍경이었다.

 

청령포를 나와 단종릉인 장릉으로 향했다.

영월읍 관풍헌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는데, 영월군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남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암장하였다. 그 후 중종 때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 묘역을 정비하였고, 숙종조에 이르러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복하면서, 능호가 '장릉'이 되었다.  조선의 제왕들은 한양성 백 리 안에 능을 썼는데,  이런 연유로 장릉만이 한양성 먼 곳인 이곳 영월에 있게 되었다.

단종 기념관을 좌측으로 끼고돌아 조금 험한 언덕을 오르면 능선을 만나고,  그 능선 위의 작은 길을 조금 걸으면 장릉이 나타난다.  목책으로 능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서 보고 싶었지만, 아쉬움만 남기고 마음을 접었다.

 

장릉 바로 아래, 사당인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사당 안에 모셔진 단종의 위패와 초상화

 

 왕이 되지 않았다면, 일생을 행복하게 살았을 것을, 야욕에 눈먼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천리 밖 영월에 유배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비참하게 운명한 단종의 삶이 너무 가엽다.  당대에 세조를 쫓아 권력을 탐하던 한명회의 무리들이 미워졌다.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의 목숨까지 빼앗은 세조가 신하들과 백성들의 벼리가 될 수 있었을까. 부도덕한 인물들이 권력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폭력과 위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세조와 그를 쫓았던 무리들이 삼강오륜을 이야기할 자격이나 있었을까마는.

 아무튼 한명회는 성공한 역모로써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어린 딸까지 세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 훗날 성종의 장인으로 무소불위한 권력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탐했었다. 그가 풍류를 즐겼다는 압구정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강남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으니, 오늘의 우리 현대사와 너무나 흡사하여, 역사 또한 무심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산과 물이 멋지게 어울려 아름다운 이곳의 자연은 가엽게 돌아간 단종 임금 덕분으로, 슬픔으로 빛나는 고을이 되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내 마음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을 이곳 청령포에 유배시키고 나서 울며 돌아가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남겼다는 시조이다.  마음과 행동을 달리 살았던 왕방연의 인간적 고뇌가 노래 속에 가득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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