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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창경궁 -씁쓸한 추억에 대한 연민

 에버랜드, 아니 자연농원도 없었던 1960년대 중반, 어린 시절엔 창경원 나들이가 꿈같은 소원이었다. 전기도 없었던 시절, 보고 싶던 사자나 호랑이는 그림에서만 봐왔기에 창경원 구경 한 번 하고 온 애는 또래의 우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국민학교 6학년 때 수학 여행지는 창경원과 남산 팔각정, 거기에 조금 보태서 배 타고 건너가던 강화도였다. 그것도 돈이 없어서 나는 가지 못했지만... 수학여행 갔던 애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도시락 싸가지고 한 나절 창경원을 나들이한 적이  있었다. 그때 회전 비행기와 목마도 타보았는데, 회전 비행기는 밖에서 볼 때만 화려했지 비행기 안은 드럼통에 널빤지 의자여서 어린 마음에 너무 실망하기도 했었다. 나이 들어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남이 가진 것이 한없이 부럽다가도, 막상 내가 갖게 되면 그 또한 별 거 아니지 않던가. 좌우간에 그 반나절 동안에 창경원에서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흔하디 흔한 원숭이도 실컷 보았었다. 그리곤 비로소 친구들과 대화에서 나도 당당히 창경원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침소봉대해서 내가 본 것에 침까지 발라 허풍까지 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1960년대 말, 시골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나도 도시로 옮겨 TV를 비롯한 매스컴 혜택을 받게 되자, 봄이면 어김없이 신문과 라디오, TV의 창경원 벚꽃놀이 보도를 보고 들었다. 신문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벚꽃놀이 흑백사진은 젊은 가슴을 들뜨게 만들곤 했었다. 그러기에 벼르고 벼르다가 70년대 후반, 성인이 되어서 한 번, 벚꽃 핀 창경원에 봄나들이 갔다가 별다른 생각 없이 봄놀이 인파에 휩쓸려 모노레일 한 번 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후, 1980년대 초에 창경원 동물들을 과천 청계산 아래로 옮기고, 창경궁으로 복원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조선의 창경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학교에서나 언론, 아무도 조선의 궁궐이 동물들의 배설물로 훼손되었음을 말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들은 소나무대신 사꾸라나무를 심어 놓고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사꾸라 꽃놀이를 즐기게 한 일제를 비호하듯, 주둥이를 내밀고 앞다투어 창경원 벚꽃놀이를 과장해서 보도했었다.  유신시대보다 더 혹독한 독재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과천 서울대공원에 동물들이 옮겨가고 창경궁이 조선의 궁궐로 복원되자, 비로소 민족의 정기를 되찾았다고 언론들은 아부성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 뒤, 차를 타고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치면서도 별 다른 감동이 없어서, 언젠가 한 번 들려 보리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창경궁에 들렀는데,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려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흐린 날씨에 아직도 온전히 복원되지 못한 창경궁의 모습과,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과거의 흔적에 마음만 쓸쓸해질 뿐이었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옥천교와 명정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 품계석이 마련되어 있고, 명정전 안에는 임금께서 앉는 용상 뒤에 일월오봉도까지 갖춰 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궁궐의 정전으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명정전 뒤의 함인정, 그 뒤가 경춘전과 환경전이다.

 

명정전에 붙어 남향으로 지은 문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곳이다.

 

명정전 뒤에 있는, 좌로부터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돌아간 곳이기도 하다.

 

앞쪽으로부터 양화당과 통명전.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중심 공간이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풍기대로 오르는 계단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본 창경궁, 좌로 집복헌, 가운데가 환경전, 우측이 양화당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을 일제가 파헤쳐 놀이배를 띄웠던 춘당지, 벚꽃 놀이의 중심지로 기억된다. 1983년 이후에 인공섬을 만들고 전통 양식의 못으로 조성했단다.

 

 춘당지 근처에 있는 백송, 흰 소나무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었다. 둥근 선 안이 오늘의 창경궁 영역이다. 도로로 잘려나간 남쪽이 종묘. <네이버 위성사진>

 

  조선 왕조의 정궁이 경복궁이라면, 창덕궁은 보조 궁궐이었고, 왕실의 식구가 늘어나자 조선 성종이 왕실의 어른들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마련한 것이 창경궁이란다. 왕족들의 생활공간을 위한 궁궐이기에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필요한 전각들을 자연스럽게 지었다고 한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건 현장이 바로 창경궁이라 전하고 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낮은 언덕을 지나 종묘로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는데,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길을 내서, 그 기운을 단절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창경궁은 남향인 경복궁, 창덕궁과 달리 동향 궁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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