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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당포, 그리고 충렬사

1. 당포항



맑고 깨끗하고 상쾌하다.

박경리 기념공원에서 되돌아나와 미륵도 해안을 달린다. 박경리 공원 가까운 곳에 당포항이 있었다. 당포항이 한 눈에 보이는 포인트를 그만 스쳐 지나버렸다. 순간의방심으로 놓쳐버린 포인트를 아쉬워하며 당포항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평화로운 포구였다.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 당포,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포구가 매우 아늑해 보였다. 맑은 해역이라 그럴까, 부두에 근접한 곳에 가두리 양식장이 널려 있었다. 대형 활어트럭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활어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어지러히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며 활어를 탐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400년전에 이곳은 더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평화스런 마을을 탐욕스런 섬나라 도적깡패들이처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양식을 빼앗고, 양민들의 보금자리에 불을 지르며, 분탕질을 쳤었다. 못난 위정자들 덕분에 백성들은 항변도 못하고 도적들에게 짓밟히고 강탈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그 때, 그 도적들을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이곳 당포에세 통쾌하게 궤멸시켜 버렸다.

그때,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들은당포에 정박해 있던 왜선 21척을 모두 격침시키고, 2천여 명의 적병을 무찔렀다. 이 해전으로 왜적의 수군 선봉부대를 격파하였다는 것 말고도, 토요토미의 신임을 받던 왜장의 목을 벰으로써 적들의 사기를 꺾어, 왜적의 서해진출 의도를좌절시켰다.



당포항을 지나해안선을 따라 달리며 바라본 남해 바다.




2. 달아공원


미륵섬 해안을 달리다보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코끼리 어금니를 닮아 달아공원이란다. 우리나라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명소라는데, 남해 한려수도를 조망하기에 썩 좋았다.




3. 충렬사

아! 충렬사. 바람앞에 등불처럼, 조국의 운명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들 때, 자신의 생명을 던져, 그 위기 속에서 조국을 구해내신 이순신 장군! 바로 이곳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다. 미륵도에서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번 방문은 두 번째였다.수년 전에는 주차장이 없어 쩔쩔맸는데, 그 사이에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계단 위가 충렬사로 들어가는입구이다.


충렬사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문


충렬사에 들어가면 첫번 째로 만나는 2층누각으로 강한루(江漢樓)라 이름하였다.


강한루 위에서 바라본 충렬사 정문 방향


강한루에서 충렬사로 들어가는 첫번 째 대문이다.


두번 째 대문


충렬사로 들어가는 세번 째 대문, 들어가는 문의 높이가 매우 낮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삼문을 지나면 드디어,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충렬사였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 위패는 빨간 비단으로 가려져 있었다.


우리를 대표해서 김부장이 이순신 장군께 참배하였다.


사당을 나와서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 보며, 한 컷을 더했다.


장군의 기념관에 전시된 대장검, 명나라 황제인 신종이 내린 하사품이란다.



열흘 전쯤, 세종로에 세워진 장군의 동상이 보수되어 다시 세워졌다. 장군의 세종로 동상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동상의 얼굴은 조각가의 얼굴이고, 장군의 갑옷은 중국식이며, 장군께서 오른 손으로 잡은 칼은 일본도이고, 동상 아래 눕혀놓은 두 개의 북은 항복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장군의 유혼이 오늘날 서울 한 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태를 굽어보신다면 얼마나 진노하실까... 구국의 영웅이신 장군의 동상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후손들이 참 부끄럽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삼천리 금수강산과 가여운 백성들을왜적에게 짓밟히게 방치하고서도,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어떠했는가? 전란 후에는 사리사욕을 뱃속에 감추고 구태연한 명분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고, 소위 공신들이 조정을 자기네 집안 다루듯, 나눠 먹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1592-1598) 끝난지 29년 만에뙤놈이라 업신여겼던, 북쪽 오랑캐들에게 1627년, 조선의 강토를 또 짓밟히고 말았다.백성들은 내팽개친 채로, 왕과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로 도망가고 말이다. 그 후 9년만에 북쪽 오랑캐들이 조선에 다시 난입하여 조선 팔도를 처절하게 짓밟아버렸었다.

남쪽 오랑캐가 두 번, 북쪽 오랑캐도 두 번을, 우리 강토에서 분탕질 칠 때, 우리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다.  그러고도 정신 못차린 조선의 위정자들은 임진왜란 일어난지 400여 년만에 1910년, 총칼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나라의 주권과 백성들을 왜적에게 송두리채 바치고 말았다.

왜적에 대한 복수의 다짐으로 장군께서는 그의 검에 글씨를 새겨 그의 각오를 다지고 전투에 임했다. "揮埽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라고. 그런 각오로 목숨을 바쳐 구해낸 조국이 장군 돌아가신지 30년도 못되어 또다른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고, 400여 년 후에는 장군이 쓸어버리고자 했던 왜적들에게나라를 바쳐버리고 만, 우리의 현대사를, 우리 후손들은 장군의 사당앞에서장군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뚫린 입이라지만 드릴 말씀이 없다.

또, 한국전쟁때,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부르짖다가, 북한군이 38선 넘어 침략한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면서, 대통령과 정치가들만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며 한강다리마저 끊어버렸던, 그 비열함은 조선시대 위정자들과 똑같은 닮은꼴로 판박이 형태이다.

과거 조선시대는 봉건주의시대니까 백성들의 힘에 한계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백성이 주인인 시대니까 백성들이 정신차리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런데, 망각이라는 망령이 너무나 손쉽게 우리를 따라 다닌다. 그러니까, 공공의 이익보다 자신과 제 집의 이익만을 추구하는속물근성을 버려야 한다. 진정으로, 통 크게멀리, 넓게보고 살아야 한다. 양심바르고,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가 뽑아야 한다. 제발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워 하는 후손이되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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