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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나가사키

공항에 나가면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미지의 세상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저마다의 가방을 메고, 또는 끌고, 세상의 각지로 떠나는 사람들의 앞길은 생각만 해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일본어도 전혀 못하면서 가이드 없이 내 스스로 지도를 보며 돌아다니는 자유여행이다. 제대로 찾아다닐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비행기는 대지를 박차고 인천대교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불과 한 시간여 만에 나가사키 상공에 도착했다. 섬이 많은 우리 남해안처럼 복잡한 해안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주보다 10여분 더 비행하는가 싶다.

 

바닷가에 조성된 나가사키 공항, 야트막한 산 위에 조경수로 '나가사키'를 새겼다. 작고 깔끔한 공항청사였다.

 

3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입국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렸나 보았다. 입국심사대에서 지문 날인을 시키고, 사진까지 찍었다. 이른바 외국인 등록이란 것인가. 에어컨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좁은 공항청사에서 땀 흘리며 한 시간여를 기다렸다. 이들의 무성의가 얄미웠다.

 

공항청사 밖, 매우 깨끗하고 상큼하다. 휴지 한 장 굴러다니지 않았다.

 

  나가사키항만 부근에 예약된 호텔. 체크인하고 10층 방안에 들어가니, 아이고! 좁디좁은 쪽방이었다. 세미더블이라는데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뒤척일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방이었다. 어쨌거나 여행의 목적은 잠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짐을 풀어놓고 호텔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그야말로 막막했다. 물어볼 대상도, 물어볼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전차역까지 나왔다가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되돌아 호텔 로비에 앉았다. 로비에서 같이 비행기를 타고 셔틀버스로 왔던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얻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500엔짜리 종일 전차표를 판다고 해서 내일 쓸 표를 미리 구입했다. 엔화 잔돈도 생겼다. 그래도 어쩌는 수가 없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부부와 동행하기로 했다. 배도 고프고, 저녁은 먹어야 하겠기에 차이나타운으로 가기로 했다. 주변 지리도 익힐 겸 도보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면서 걸어서 이동했다.

 

  나가사키는 전차의 도시였다. 우리나라 시내버스 정류장보다 더 가까운 거리의 정류장들을,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중반까지 봐왔던 모양의 전차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이나타운이 있었다. 여행 안내서에는 일본의 3대 중국인 거리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인천 차이나 타운보다도 작아 보였다. 나가사키 짬뽕이 매우 유명하다고 해서 유명 짬뽕집을 찾아다녔다. 나야 쫓아다니는 입장이었지만... 일요일이라서인지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옛날 중국인들이 살던 거리란다. 중국의 옛 건축물들이 남아 있었다.

 

골목의 비탈길과 어지러운 전깃줄, 그리고 작고 낡은 집들... 2층집들이 대부분인데, 아래층은 주차장이다. 그 때문인지 길가에 주차한 차량들은 거의 볼 수 없다.

 

 

옛날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건물이라는데, 국가 지정문화재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길가의 전차역

 

묻고 물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일 유명한 짬뽕집이란다. 우리말로는 "사해루"인데, 5층으로 안내받아 올라갔다.

 

사해루 앞에 있던 메뉴판, 우리에겐 이런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림을 보고 선택한 메뉴는 '사라짬뽕' 가격은 997엔. 짬뽕 한 그릇에 우리 돈으로 약 14000원. 일본의 고물가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크림수프를 섞은 듯한 짬뽕은 맛이 있었다. 배도 고팠고, 일행과 얘기하며 먹다 보니 사진을 찍지 못했다.

 

5층에서 바라다본 나가사키 항만 전경- 석양에 저물어가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계획했었던 이아사야마 전망대를 방문하지 않아도 그만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

 

8시가 넘자 어두워졌다. 창밖으로 야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보였다.

 

창밖의 나가사키 부두 풍경

 

식사 후, 직접 밖으로 나가 바닷가에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iso감도를 6400까지 올리고 조리개를 최대로 열었는데 속도가 1/15밖에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호흡을 멈추고 정지 상태에서 몇 장을 찍었다. 인적도 없는 곳에서 이방인이 야경을 찍는다는 것은 일본이니까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전차를 탔다. 120엔인데 동전이 없어 쩔쩔맸는데, 일행분이 전차기사에게 두 명 차비로 500엔 동전을 건네니, 전차 기사가 기계에 동전을 넣었다. 전차비가 계산된 줄 알고 거스름 돈을 확인해 보니, 100엔짜리 동전 4 개와 10엔짜리 열 개가 나왔다. 영문을 몰랐는데, 전차기사가 지폐를 넣은 곳은 잔돈 교환기였다. 전차비는 내릴 때 계산한다는 것이었다. 전차는 뒤로 타서 앞으로 내리는데, 내릴 때 운전기사에게 직접 돈을 내거나, 우리나라처럼 탈 때와 내릴 때 카드로 찍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내릴 때 240엔을 운전기사에게 주었다.

 

전차 안에서 일본 여대생을 만났는데,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다. 나가사키 학생들은 대부분이 수수하고 검소한 차림이었다. 이 학생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우리 일행을 유명한 안경다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나가사키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안경다리. 몇 백 년 전 중국인이 건설했다던가. 이곳에서 숙소까지 다시 도보로 걸어왔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제2일 차, 아침에 일어나 호텔밖 풍경을 한 컷 남겼다. 멀리 여신대교(女神大橋)가 보였다.

 

어제 경험에 용기를 얻어 아침 식사 후 일찌감치 서둘렀다.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 아웃하고 배낭을 맡긴 뒤, 노란 번호표를 받아 넣고 나서 호텔을 나왔다. 어제 구입한 종일 전차표를 이용해서 나가사키역으로 나갔다. 오늘은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독립해서 미리 조사해 둔 명소들을 순서대로 답사할 예정이다. 호텔 옆 역에서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역으로 나갔다.

 

나가사끼 역사 건너편의 일본 26인 순교성지와 니시자카 천주교회- 교회를 찾는데 한참 걸렸다. NHK 뒤라고 했는데, 방향 감각을 잃어 한참을 서성거렸다. 말을 못 하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NHK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방송국 뒤편 언덕을 조금 오르니 성당 첨탑이 보였다.

 

 

159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에 6명의 스페인 선교사와 일본인 최초의 선교자 26명을 처형한 곳이다. 1862년에 로마교황이 이들 26인을 성인聖人의 명단에 올려 주었고,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62년에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26 성인 기념관과 니시자카西坂 천주교회를 건립했다는데, 교회의 첨탑이 매우 이채로웠다. 순교자들이 성인으로 추대된 것이 우리나라보다 100여 년은 앞섰다. 우리나라에선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할 무렵, 일본에서는 순교한 사람들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기념비 뒤에 있는 순교기념관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참관하지 못했다. 오전 9시에 개장이란다.

 

되돌아 나와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후쿠사이지 절로 걸어가는 도중에 마주친 사당인데, 여행 중 이런 곳을 자주 보았다. 이동 중 방향을 모를 때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명을 정확히 알거나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하겠다.

 

후쿠사이지 절 - 높이 18m나 되는 관음상이 있어 ‘나가사키 관음사’라고도 한다. 이 절은 1628년 창건되었는데, 이때가 기독교 박해가 한창 심하던 때로 누구든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이곳에 살던 중국인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증표로 이 절을 만들었다. 거북이 등에 관음보살이 서 있다. 원폭이 떨어진 오전 11시 2분에는 원폭 희생자들을 위한 종을 울린다. 입장료가 200엔인데, 9시 이전이라서 돈 받는 사람이 없어서 무료 관람했다.

 

 

절 입구에 있던 작은 사당 - 석상에 빨간 옷을 입혀 놓은 것이 특이해 보였다.

 

나가사키 역사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사찰, 동네 한 복판에 있는 전통가옥 모양이라 들어가서 둘러보았다. 단청도 없고, 시커먼 나무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나가사키 역사박물관으로 2층 입장료만 500엔인데, 한국어 설명 기를 대여해 주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한국어 학습기 사용법을 한 번 설명을 듣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와 활용하려니 작동법을 잘 모르겠어서 난감해하다가 내부에 안내하는 할아버지들에게 되묻고서야 사용할 수 있었다. 전시실 번호를 수동으로 입력하면 설명이 작동되었다. 우리나라 박물관에서는 전시칸 앞에 서면 자동으로 설명이 시작되던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린 일본인의 모습

 

 

네덜란드 사람들로부터 전수받은 조총 기술이 일본의 통합을 가져왔고, 이것이 임진왜란의 동기가 되었다.

 

일본 개항의 관문인 나가사키! 이곳을 통해 네덜란드 상인들을 매개로 유럽의 문물들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박물관 출구 벽면에 걸린 대형 사진, 네덜란드 사람들과 사무라이 모습 속에 임진왜란의 슬픔이 묻어오는 듯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평화공원으로 갔다. 뜨거운 햇빛이 사정없이 내려 쬐였다. 땀이 흘러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더웠다. 게다가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가 습한 바람도 한껏 뚜벅이 탐방을 어렵게 했다.

 

 

 

 

원폭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조형물이다. 원폭 당시 사람들이 물을 찾다 처참하게 고통 속에 죽어 갔기에, 그 영령들을 위해 생수병을 갖다 놓았다.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군국주의의 망상을 꿈꾸는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 말종이 아닐 수 없는데, 일본 극우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평화공원을 오르내리는 계단

 

평화공원 바로 100m 정도 거리에 있는 원폭투하 중심지이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이곳에 원폭이 떨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에 원폭이 떨어져 나가사키 주민 8만여 명이 사망했다. 인류 최초로 핵폭탄의 참화를 겪은 일본인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 경지로 몰아넣었을까? 극우로 치닫는 일본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다.

 

원폭으로 파괴된 천주교회 잔해

 

 

피해 당시 지층

 

죽어가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상

 

아기 엄마는 까만 장미 꽃송이들이 붙어있는 주름치마를 입고 망연자실 서있는 모양이다. 

 

너무 더워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중심가로 이동했다. 전차 안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어 매우 시원했다.

 

인구 약 50만 정도의 중소 도시인 나가사키,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도시임에도 건물 외벽에 간판이 정리되어 있었다. 거리 모양이 우리나라와 유사한데,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우리의 가치관이나 거리 문화는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

 

 

 

전차 종점에서 내려 무조건 고동색 이정표를 보고 찾아간 곳이 정각사(正覺寺)였는데, 고풍스러운 자취가 남아 있었다.

 

절의 내부는 다다미를 깔고, 사람들이 의자에 앉았다.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외는데,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서 금속성 소리가 났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구성진 독경 소리와도 차이가 많았다. 아마도 죽은 이의 혼백을 위로하는 듯...

 

절의 맞은편 산자락은 산세가 험했는데, 대부분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절의 뒷부분으로, 절 뒤에는 망자들의 집이 있었다.

 

 

다시 전차를 타고 나가사키항만으로 나왔다.

 

바다 위에도, 보도에도, 차도에도 빗자루로 빡빡 쓸어 놓은 듯 쓰레기 조각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항만 분위기로는 우리나라 통영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통영항에 비해 모든 것이 너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구 끝자락에 보이는 것은 여신대교이다.

 

 

  가이드 없이 아내와 함께 한 나가사키 여행, 지나고 보면 사전에 가보려고 메모했던 곳이었다. 평범한 거리로 알고 지나쳤던 곳에 오랜 역사와 유래가 있었던 곳이 많았다. 시행착오라 여기며 위안을 삼았는데, 이런 여행을 계속해나가야 할지 어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하나, 장점이라면, 패키지 단체 여행에 꼭 끼는 쇼핑센터 방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일본어 구사가 부럽다.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일까. 그들의 행선지에는 막힘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독일어를 2년이나 배웠고, 대학 1학년 때도 교양 과목으로 한 학기를 더 배웠었다. 지금은 독일어로 하나에서 열 까지 세지도 못한다. 외국 여행을 하노라면 제일 부러운 것이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다. 보디랭귀지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지만, 막가파 몸짓 소통보다는 언어 소통이 훨씬 더 유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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