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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제암리를 아시나요?

  지진과 해일로 일본 열도가 난리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부숴진 원전 때문에 또 일본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기도 하구요. 한류스타들의 기부행렬과우리나라 방송사에서 걷은성금들이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했겠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일본 정부는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등재한다네요.

  화성시 제암리를 지나다가 문득 가슴이 아려와서, 차를 멈추고 한 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자주 지나는 곳이라 별 느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지울 수 없는 일제의 악랄한 만행의 흔적들과, 일본 열도의 재앙에 대한 측은함과, 독도 영유권을 자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일본정부의 간악함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놀랍게도 3월의 하늘은 푸르고 맑았습니다. 차갑긴 했지만 봄바람이 정신을 맑게 해주었구요. 순백의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여객기를 보면서 격세지감 속에 잊혀지지 않는 흔적들을정리해 보았습니다.

  안내판과 3.1 운동 순국 기념비 뒤로 보이는 흰 색 건물이 제암리 교회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해방 후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 되자, 일본 기독교 단체들이 사죄의 성금을 걷어 그 자리에 새로운 교회를 지어 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암리 주민들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정부의 압력으로 하는 수 없이 교회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정비하면서 기념관과 교회를 새로 옮겨 지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지어준 교회는 현재 3.1 정신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내문입니다. 클릭하시면 원본으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새로 지은 교회와 기념관입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국기 게양대 앞에 있는 작은 탑이 1959년 최초에 세웠던 기념탑입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기록화입니다.

 

  기념관 제1 전시실입니다. 플레쉬 반사 때문에 기록화가 선명치 않습니다만... 일본 헌병들이 교회에 불을 지르고 사격을하는 그림입니다.


당시 일제의 방화로 페허가 되어버린 제암리 마을의 모습입니다.


기념관 제 2 전시실인데, 일제가 제암리 이웃 마을인 고주리에 가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재현한 모형입니다.


순국하신 23인들의 열사들의 유택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23인들이 합장되어있는 묘소입니다.


23인의 열사들을 합장하게 된 까닭은 일제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하여, 이들의 시신을 이곳에서 3km 정도 떨어진 도이리에 암매장했던 것을 해방후 발굴하게 되면서 서로 섞여 알 수 없는 유골들을 수습했기 때문입니다.


묘소에서 내려와 공원처럼 정비된 제암리 순국 유적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 컷으로 정리한 제암리순국유적지입니다. 왼편엔 교회와 기념관, 가운데가 열사들의 묘, 오른 쪽이 옛교회터에 일인들이 지어주었다는 교회(지금은 3.1정신 교육관)입니다.


  제암리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소재하는 마을입니다. 옛날에는 두렁바위라고 불렸던 평화스러운 마을이었지요. 그런데, 1919년 3월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제암리가 있는 화성시 향남면 발안에서도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이주재소를 습격했습니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이를 보복하고자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맙니다.  
  일제 헌병들은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습니다.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에 못질을 한 뒤,교회안에 일제사격을 했습니다.사격 후에는 교회의 초가지붕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습니다.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습니다.탈출하다 사살된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구요.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를 일본 헌병들이 무릎을 꿇리고 칼로 목을 쳐서살해하였습니다.'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그리고나서 일제 헌병들은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습니다.이렇게 일제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주민들은 모두 29 명이었습니다.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틀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현장을 확인하러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코필드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크게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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