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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을 걷다 - 지리산 천왕봉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미루려고 몇 번을 마음먹었다가, 약속된 제 날짜에 감행하기로 했다. 중산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천왕봉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였다. 셔틀버스는 법계사에서 운행하는데, 차비는 받지 않고 승강대에 보시함을 놓고 임의대로 넣도록 했다. 1000원을 넣고 3km를 올라왔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콩나물 버스를 탄 셈이었다. 미니버스 기사는 그리 친절하지 않아서, 등산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퉁명스러웠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들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은 것이 공통점이라면 내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입장료 징수에 눈을 부라리는 사찰 측 직원들.  절과는 상관없이 등산 왔다가 보지도 않을, 절 입장료를 어쩔 수 없이 뜯기는 관광객들...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 온다는 우려와는 달리 날씨가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로 멀리 천왕봉 머리가 빤히 보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지리산 제일봉이던가? 젊었던 청장년 시절, 지리산 종주를 한답시고 노고단으로 두 번을 올라가 지리산 능선을 걷다가 너무 힘들어, 두 번 모두 뱀사골 아래로 하산하고 말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천왕봉인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등반 예정 코스는 중산리 법계사 입구- 로터리 대피소- 법계사- 천왕봉- 장터목대피소-백무동인데 소요 시간은 대략 7-8시간 정도로 예상했다.

 

1. 천왕봉에 오르다.

 

오르는 숲 사이로 천왕봉이 보였다.

 

아직 떨어지지는 않은 단풍잎들이 오그라진 채로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이정표를 보니 옛날에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조선 중종조 때 조식의 시조가 떠오른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졔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예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복숭아 꽃피는 봄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무릉도원까지는 아니고, 비록 색 바랜 단풍이었지만 보기에 좋았다.

 

잎 떨어진 나목 사이로 건너편 능선들이 정겹게 보였다. 왼쪽으로 잡목에 가려진 천왕봉이 살짝 보였다.

 

그늘진 곳엔 눈길이다. 설악산에 눈 내렸다고 하더니, 설악보다 더 높은, 남쪽 이곳에도 내렸나 보았다. 남들보다 겨울을 한 달은 더 일찍 맞이하는 셈이었다.

 

뛰어난 절경은 아니지만 제법 아기자기했다.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도 있고...

 

높은 산 중턱에 예외 없이 나타나는 신호대 숲이다. 신호대 숲길을 오르는 나무계단, 이제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가슴의 북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질척이는 눈을 밟으며 겨울 기분을 미리 내보았다.

 

드디어 대피소를 만났다. 이른바 로터리 대피소. 대피소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대피소 왼쪽의 이정표

 

반달곰을 만나면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반달곰 방생에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던데... 내 소견으로는 좋은 일인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곰들의 개체수가 많아지면 등산객들이 위험해질 것 같다. 마을 주민들도 곰 떼들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겠고...

 

가파른 돌길을 조금 올라간다.

 

적멸보궁 법계사,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이다. 요즈음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도 하도 많으니 이곳 부처님 진신사리는 신라 법흥왕 때 모셔온 것이란다. 일주문에서 경내를 바라보며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일주문을 떠나며 아쉬움으로 한 컷 남겨 보았다.

 

다행히 황톳길도 있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런 길에서 시간을 벌어야 여유가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바람이 거세졌다. 땀이 흐를 사이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던 구름들이 바람을 타고 무섭게 몰려들었다.

 

왼쪽 능선의 산봉우리에 구름이 휘감기고 있었다.

 

전진 방향, 머리 위로 흰 구름들이 굉음을 내며 총알처럼 빠르게 휙휙 날아간다.

 

길은 가파른 돌길이었다. 구름이 날아가는 굉음을 들으며 조금씩 위로 올랐다.

 

그늘진 곳의 설경도 느껴보며... 구름의 양이 늘어, 이미 아래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이정표가 나타났는데, 작은 벼랑 옆에 직사각형으로 세워진 바위사이를 개선문이라 이름하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천왕봉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산정의 봉우리에 구름이 걸리기 시작했다.

 


천왕봉까지 600m 고지가 바로 저긴데... 1시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파란 하늘이 점점 구름으로 덮여 갔다.

 

그 사이 천왕봉에 구름이 더 모였다.

 

천왕봉을 바라보며 오르는데, 큰 안내판이 보였다. 남강 발원 샘이라고 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손바닥만 한 바위틈사이에 물이 고여 있었다.

 

천왕샘에서 정상까지 300m 남았다.

 

우측으로 돌아 오르는 나무계단이 나타났다.

 

이제 산정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산정을 향하여 힘을 쏟아 오른다.

 

드디어 산정에 섰다. 그러나 주위는 구름으로 뒤덮여  5m 이상 시야확보도 되지 않았다.

 

모처럼 인증숏을 남겼다.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곳이라 감개무량하다. 사진 찍는 젊은 분의 솜씨가 좋았던 덕이다.

 

 

2. 구름 속을 걷다

 

구름 속에 갇혀서 어두운 탓에 정상 위의 조망도조차 읽기 어려워졌다.

 

정상에서는 역시, 마음속에 점 하나를 찍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정이라 몹시 허무하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최정상을 올랐다는 뿌듯함으로 만족해야지... 한라산 등반했을 때도, 속리산 천황봉에 올랐을 때도 같은 경험을 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백두산에 올랐을 때는 처음엔 구름 때문에 천지를 볼 수 없었지만, 홀연 바람이 구름을 몰고 가자, 순간적으로 천지가 활짝 나타났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조금 지체했으나,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내려가는 길은 아예 눈밭이었다.

 

철계단을 지나 바위틈 사이로 돌계단을 내려가니, 통천문이란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데, 지금은 구름 밖에 볼 것이 없다.

 

해발 1814m의 통천문 이정표.

 

눈길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때로는 질척이고, 때로는 미끄럽고... 그래도 얼어붙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정표를 만났지만 이곳은 평원지대 같았다. 사방이 구름이라 시야가 답답했다. 그저 구름 속을 걸을 뿐이었다.

 

보도블록을 박아 놓은 듯한 돌길만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혼자 걸었다.

 

눈길이 나타나기도 했고...

 

돌길이 나타나기도 했다.

 

제석봉 이정표가 나타난다. 봉우리라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구름 속을 거닐며 신선의 기분이라도 내 보고 싶으나, 차갑고 거센 바람 때문에 콧물이 흐르고 손이 시렸다. 바위를 짚고 내려오느라 장갑 낀 왼 손바닥이 흠뻑 젖어 손끝이 아리도록 시렸다.

 

안갯속을 더듬듯 그저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다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만날 뿐, 산속은 구름과 바람 소리밖에 없는 듯했다. 옛날보다 덜 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옛날엔 등산인구가 적어서 그랬는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인사를 했는데, 요즘은 깊은 산에서야 인사를 나눈다.

 

다행히 외길이라 홀로 내려가는 산행도 헛갈리지는 않았다.

 

돌길이 미끄러웠다. 한두 번을 넘어질 뻔했다. 스틱을 짚고 조심하는 것이 최선이라 조심 또 조심했다.

 

철계단 아래로 건물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장터목 대피소였다. 추위도 피할 겸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취사하느라 피운 가스버너 열기에 제법 훈훈했다. 다리가 아파 취사장 안에서 밖으로 나와, 가림막 쳐진 곳에 마련된, 투박한 나무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준비해 간 김밥의 밥알이 딱딱하게 굳어 씹기도 힘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식사 후 들이킨 찬 물에 뱃속이 거북해졌다. 보온병을 준비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지난 10월 설악산에 갔을 때는 보온 도시락에 보온 물통을 가져갔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이번엔 그냥 갔더니 후회막급이었다.

 

찬밥에 찬물을 먹은 탓에 몹시 추웠다. 바람막이 겉옷까지 꺼내 입었는데도 온몸이 떨려왔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선, 또 걸어야지. 걷는 것이 체온을 올리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대피소에서 20분여를 보냈으나, 너무 추워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객들을 위해 장작 난로라도 좀 피워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3. 가을 숲에 빠지다

 

구름층을 통과했는지, 시계가 좋아졌다. 사람 키만큼 자란 신호대 숲길로 한참을 내려갔다.

 

까마귀들이 날아다닌다. 한라산에서도 설악산에서도 까마귀가 그리 구슬피 울더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까마귀는 높은 산을 좋아하나 보다.

 

신호대 숲의 황톳길이 끝나고 'ㄱ'자로 좌회전하는 길목에 다다랐는데, 급경사 내리막 돌길이 나타났다. 젊은이들이 하나 둘 숨 가쁘게 올라오는 것이 안쓰럽게 보였다.

 

아아 돌길... 소백산 희방사 길, 설악산 오색의 돌길... 무릎이 욱신거릴 정도로 피곤하게 했던 돌길이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 돌길은 백무동까지 이어졌다. 오른쪽 무릎에 그나마 보호대를 찼던 것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골짜기를 걸어 타박타박 걸으며 무릎과 타협해 가며 내려갔다.

 

그나마 돌길을 예쁘게 다듬어 놓긴 했다. 예산이 없어 돌만 깔았다면, 폐타이어 고무 쿠션을 개발해서 깔아주면 좀 안 될까. 그건 공해일까. 나무 널빤지 길을 바라는 건 고급스러운 사치이겠지... 별 생각을 다 하면서 걸음마 걷듯 한 걸음씩 다리를 옮겼다.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밟으며 샘터에 도착했다. 아직 백무동 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샘이라는데, 돌축대에 파이프를 박아 놓았다.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샘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이었다. 어쨌든 마련된 플라스틱 바가지로 한 잔을 쭈욱 마셨다.

 

점점 나를 스치어 앞질러 가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나로서는 당최 이 돌길은 어쩔 수가 없다.

 

1.8km, 평지라면 20분이면 걸어갈 텐데... 쓸데없는 계산을 해보며 내려가는데, 바람이 계곡물처럼 소리를 내며 나무를 흔들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날아간다.

 

나를 스쳐간 사람들과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데, 나는 나뭇잎 떨지는 풍경에 취해 있었다. 그 많은 나뭇잎들이 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우우우 소리 내며 떨어져 날아다녔다. 자연의 향연을 마음껏 누리고, 미련 없이 바람 부는 대로, 그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

 

백무동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떤 이가 이정표 거리 표시를 지우려 했나 보다. 나처럼 지루한 이 돌길에 지친, 나그네가 아닐는지... 그렇다고 저걸 지우면 또 다른 나그네들은 무엇으로 위안받을 수 있을까.

 

오래된 나무 아래 돌들을 쌓아놓았다. 성황당은 아닌데, 이를 보면, 가까이 민가가 있을 것이리라.

 

바람은 사정없이 불어대는데, 아직 단풍잎새가 곱게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나뭇잎은 바람결에 날려 가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들은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날아가는 나뭇잎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정지된 사진의 한계로 그 장관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 동영상이라면 좋았을 텐데...

 

바람에 날려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밟으며, 색깔 고운 골짜기를 타박타박 내려갔다.

 

골짜기가 거의 끝나는가 싶다. 내려갈수록 단풍색이 고왔다.

 

잎 떨어진 감나무에 감들만 주렁주렁 달려 있다. 산등은 불타는 듯 새빨갛게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드디어 골짜기 끝이다. 탐방 안내도를 보며 지나왔던 여정을 되새기었다. 그야말로 꿈속의 여정이었다.

 

지나온 골짜기 뒤로 먹구름이 몰려온다. 울긋불긋한 골짜기를 단숨에 뒤덮을 기세로 시커먼 구름들이 강풍을 타고 뒤쫓아왔다.

 

이번 여정의 끝, 백무동 주차장... 다행히 비는 만나지 않았지만 정상에서의 호연지기는 크게 맛보지 못했다. 뒷날에 대한 여운이라 생각하며, 뒤돌아 마지막 셧터를 눌렀다. 먹구름이 심상치 않게 몰려들었다.

 

오후 다섯 시쯤,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사나운 빗줄기가 몰아쳤다. 사나운 바람과 뇌성이 여름철 소낙비보다 더 거세게 내리쳤다. 하루의 여정이, 때리는 빗줄기 속에 씻겨나갔다. 오늘 하루의 고단스러운 피곤함도 비와 함께, 추억 속의 한 장으로 남겨질 것이다.

총 6시간 30여분 소요(법계산 출발시간 오전 10시 - 천왕봉 도착시간 오후 12시 25분 - 출발 12시 42분- 장터목 도착시간 오후 1시 35분- 출발 2시 00분 -백무동 주차장 도착시간 4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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