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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도심 속의 왕릉(선릉과 정릉)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강남 한가운데 선릉과 정릉을 찾았다. 이곳은 본디 한강 남쪽에 자리하여 한적하고 수려한 곳이었겠지만, 현대에 이르러 조국 근대화의 개발정책으로 서울의 최대 번화가인 강남의 한 복판이 되었다. 그 덕에 왕릉은 주변이 훼손되어, 고층빌딩 아래 고개 숙인 모습으로 간신히 왕릉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선조 9 대 성종대왕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왕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유택인 선릉은 오른쪽 청룡 부분의 산자락이 헐려,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도로 곁에 놓여 있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은 성종과 중종의 정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듯했으나, 봉분을 감싸는 배산(背山)이 없어져서, 그 역시 허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선 11대 중종은 그의 여자들을 떼어놓고 부모의 지척에서 홀로 영면하고 있다. 단릉인 정릉은 성종의 능과는 반대로 오른쪽 백호의 산세가 잘려나가 도로와 빌딩이 되었다.

  1970년대 강남개발을 할 때, 문화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가졌더라면 이처럼 볼 품 사나운 왕릉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곳의 능들을 동구릉이나 서오릉 등으로 이장이라도 했으면 좋을 성싶다. 그리하면, 이곳은 이곳대로 어정쩡한 왕릉이 아니라 공원이 되어,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아름답고 쾌적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지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내 짧은 소견으로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선릉의 정자각- 정자각 뒤편에 성종대왕의 능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오른 쪽에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있다. 정자각 하나에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묘를 쓴, 이와 같은 묘를 동원이강형이라 한다.

 

 

 

정자각 왼편으로 성종의 능이 보인다.

 

 

성종의 능 왼편에서 바라본 능역

 

 

성종의 능, 서남쪽 방면

 

 

성종의 능에서 바라본 정자각

 

 

 

 

정현왕후릉에서 바라본 성종릉 방향

 

 

정현왕후의 능

 

 

능앞의 석물

 

 

 

선릉에서 정릉으로 가는 숲길

 

 

문화재청 직원들이 봄맞이로 배수로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경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강남 한 복판에서 경운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릉의 정자각 뒷문으로 바라본 중종대왕의 능으로 단릉(單陵)이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으로 정현왕후의 장자로서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으로 조선의 11대 왕이 되었다. 원비인 단경왕후는 양주의 온릉에, 첫째 계비인 장경왕후는 고양시 서삼릉의 희릉에,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는 서울시 노원구 태릉에 있다.

 

 

 

정자각 처마아래 동남쪽 방향

 

 

중종대왕의 비각

 

 

비각에서 바라본 능역

 

 

정릉의 원경- 왕릉의 좌측이 바로 도로가 되었다.

 

 

 

선릉과 정릉의 재실

 

 

 

 

 

선릉 문화관 내부에 있는 자료사진

 

 

입구

 

 

주소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사이트 : seonjeong.cha.go.kr/

 

 

조선 전기 막장 드라마의 후견인이자 절대권력가한명회와 비운의 두 딸

 

  성종의 원비는 공혜왕후로 한명회의 딸이다. 후사없이 18세에 승하하여 파주 순릉에 모셨고,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는 서삼릉의 회묘에, 계비 정현왕후는 이곳 선릉의 동편 언덕에 모셨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로 성종의 아버지인데, 세조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죽고 말았다.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19 세로 왕위에 올라 예종이 되었다.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큰 딸로 아들 하나 낳고 17세에 요절하였고, 예종은 즉위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예종이 요절하자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는데, 이 분이 바로 성종이다. 첫째 아들이 아니고 둘째였던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데는 정치적 내막이 숨어 있었다. 죽은 예종에게는 네 살 난 아들 제안군이 있었고, 자을산군에게는 형인 16세의 월산대군이 있었다. 세조비 윤씨는 13세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자신이 더 오래 섭정을 할 수 있었고, 한명회는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삼음으로써, 권력의 기틀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큰 딸은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에게, 둘째 딸은 세조의 손자인 자을산군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두 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었다. 한명회의 철저한 권력지향적 처세는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 이상이다. 당시, 한명회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한명회의 두 딸은 왕비로서 달콤한 영화를 누리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으니, 한명회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을 일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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