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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White christmas

 

  송년회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어둠 속 가로등 불빛 사이로 함박눈이 봄나비 떼처럼 바람에 날렸다. 순간 눈길 운전을 해야 할 두려움도 잠시 잊고 동심으로 돌아갔다. 모였던 동료들도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하게 활짝 웃었다. 모처럼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난 표정으로 행복한 모습을 지었다. 3차로 들린 생맥주집엔 선점하고 있던 중년의 손님들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십년지기라도 대하듯 친절하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여전히 눈은 창밖에 바람을 타고 내려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속이 좋지 않아 금주하는 중이라 병아리 물먹듯 조금씩 술잔을 빨고 있던 나는 맨 정신으로 눈과 술에 취해 행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웃사이더로, 늘 중심에서 한 발짝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곤 했던 나는 술자리에서도 같이 취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함께 근무했던 직장 동료들이라 공유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세상살이 잡다한 이야기들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을 치며, 유쾌하게 담소했지만,나 혼자 말짱한 정신으로 취중 세계에 동화되지 못했기에 아웃 사이더의 외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1시가 넘어서 생맥주집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는 이미 흰 눈으로 덮혀 있었다. 자동차 유리창에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내고 골목길에서 큰길로 접어들자, 도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4거리에선 신호등만 나 홀로 깜빡거릴 뿐, 차들은 신호를 무시한 채로 엉겨 붙어 눈치껏 저마다 조금씩 앞으로 갔다. 뒷 유리창엔 눈이 쌓여 뒷 쪽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기어가다가 언덕길에서 한 시간 이상 어려움을 겪었다. 고갯길 가장자리에 화물차나 승합차 같은 후륜자동차들이 주인을 잃은 채로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수동 차량의 한계 때문에 언덕길을 오를 때는 멈출 때마다 걱정이었다. 오르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릴 것 같은 불길한 생각에 잔뜩 긴장했었다. 다행히 무사히 등판에 성공했다 싶었는데, 내리막 길에서는 지그재그로 미끄럼을 타고 말았다. 엔진 브레이크를 걸었음에도, 미끄러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두 시간이나 넘게 설설 기어서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가슴과 허리에 뻐근한 통증까지 찾아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순백의 겨울이 펼쳐져, 선 듯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비로소 이제야 흰 눈과 함께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간밤에 고생했던 그 길에는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량들은 빠르게 달리진 못하지만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 때문에 교통이 원활하지 못해 불편하지만, 그 덕에 모처럼 눈 덮인 세상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교인이 아니라도 성탄절은 즐겁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미국 문화 때문이겠지만 흥겨운 캐럴송이 흐르면 대중들은 낭만적 환상에 빠져들고 만다. 어렸을 때 흔히 보았던 엽서- 흰 눈이 쌓인 순백의 언덕 위에 높은 첨탑의 십자가가 있는 교회당이 멀리 보이고 다정하게 손을 잡은 젊은 연인들이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그림엽서를 떠올리게 한다. 울타리 속에 갇혀서 젊음을 통제받던 군인 시절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전우들에게 팔았었다. 불우 이웃을 돕자고 외상으로 카드를 만들어 돌렸는데, 호응이 꽤나 좋았다. 그땐, 의상실에 가서 옷 만들다 남은 자투리 헝겊을 얻어다가 소녀 그림에 옷을 오려 풀로 붙여 만들기도 했었다. 소녀 옆에는 철모와 소총 같은 소품들을 그려 넣어 군대 분위기를 한껏 살렸었는데... 카드를 받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M16 소총 그림을 발견하고 놀라지는 않았을는지... 그때 함께 카드를 만들던 작전과 타자병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지...

 

  모처럼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도시의 찌든 때를 흰 눈으로 덮어버리듯, 고달픈 서민들의 삶에도 흰 눈 같은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내려,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臾)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그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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