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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단풍은 이미 떨어져 땅바닥에 칙칙한 잔해를 남기며 부서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파는 내장사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종종 걸음으로는 앞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 전날 비가 내린 까닭으로 웅덩이엔 빗물과 단풍잎들이 엉켜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내장사 입구직전까지 걸은 후, 우회전하여 서래봉 가는 비탈길을 올랐다.



내장사 가는 길


가파른 비탈길을 조금 오르니 벽련암(碧蓮庵)이 나타났다. 울창한 숲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서래봉 암벽능선을 보기 위해서라도 암자에 들려야 했다. 본디 백련암이었다는데, 추사 김정희 선생이 벽련암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계단을 올라 암자 안으로 들어서자 서래봉 암벽 능선이 병풍처럼 내장산 골짜기를 감싸고 있었다.


암자 앞 다락 위에 올라서서, 벽련암 전경을 조망했다. 구름 많은 날씨에 역광이라 눈이 부셨다. 멀리 케이블카 전망대가 지척에 다가 섰다.


벽련암을 왼쪽에 두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가파른 길이라 완전 갈 之 자 등반로를 숨가쁘게 올라갔다.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케이블카 승강장과 방금 지나온 벽련암이 보였다.


석란정지-조선말기 유림들이 모여 명성황후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했던 서보단이 있던 곳으로 석란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정자와 석란은 없고 석란정이란 글씨만 남아 있다. 글씨는 조선말기 여류묵객 몽연당 김진민의 글씨이며, 이 정지를 보존하기 위한 36 명의 명단이 함께 새겨져 있다.


갈 자 등산로


서래봉 오르는 고갯마루에서 나그네들이 돌더미를 쌓아 올렸다.


지나온 암릉에 등산객들의 옷들이 단풍처럼 붉다.


 암벽 사이 고개마루에서 숨 한 번 고르며, 지난길을 돌아보니, 내장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헬기가 낮게 떠서 골짜기를 맴돈다. 누군가가 사고를 당한 모양이란다. 등산로가 미끄러워 낙상의 위험이 클 듯했다.


 바로 아래가 벽련암, 오른 쪽이 내장사, 그리고 왼쪽으로 멀리 케이블카 승강장.


가파른 쇠계단을 지나 암릉을 오르내리다 보니, 눈앞에 서래봉이 보였다.


서래봉과 내장사


뒤가 바로 서래봉


서래봉에서 잠깐 쉬고 불출봉으로... 암릉 산행이었는데 보이는 북서쪽은 내장산 계곡 밖이다.


서래봉 뒷벽으로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데, 사람들이 많아 시간을 지체하였다. 좁은 길로 사람들이 왕복해야하기 때문에 한참을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내장산 북쪽 능선을 타고 미끄러운 산길과 사다리를 타고 넘어 다시 내장산 안쪽으로 들어섰다. 중간에 길을 잃은 것 같아, 오는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제각각이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살피고는 앞길로 나아갔다.지나온 뒷길로 우뚝 솟은서래봉이 보였다.


불출봉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불출봉 서북방면, 망해봉과 그 아래 저수지가 아스라이 나타났다.


  불출봉에서 좌회전해서 내장사 방면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으로 목적지인 신선봉까지 여정은 애시당초 틀린 것 같았다.  최소 망해봉까지는 나가야 했을 것 같은데, 아쉽긴 했지만 일행에 민폐끼치는 것보다는 간편 산행이 차라리 나았다.

  너무나 서민적인 원적암, 민가를 암자로 사용하는지, 수많은 내방객으로 붐비는 내장사에 비하면 너무나 검소해 보였다. 관세음보살님의 황금옷이 암자와 어울리지 않으나, 보살님의 모습이 어색하여, 얼핏 본 첫인상이 허영만의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 같았고, 흔히 볼 수 있는 상호는 아니었다.  암자에 어울리는 자그마한 석불 정도라면 몰라도...


원적암 바로 아래, 비자목 군락지, 비자목은 처음 본 것 같다. 바둑판으로 비자목이 제일이라는 김소운님의 "인생의 묘미"라는 수필이 생각났다.


철늦은 단풍 몇 잎을 바라보며 내장사를 향해 하산했다.


  내장사 본당 앞에는 최근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새로이 서 있었다.  그 앞뒤로 연등이 마당이 좁은 듯이 가득했다. 사찰의 재정을 살피려면 매달린 연등을 보면 된다던데, 이곳의 연등은 대웅전 넓은 앞마당을 채우고도 넘치는 듯했다. 법당 천정에 매달린 연등도 대단할 텐데...  게다가 내장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징수하는 이른바 문화재 관람료라는 것도 엄청날 것이다. 내 보기엔, 마당과 도로변까지 점령한 연등들은 불심을 넘어 탐욕의 상징처럼 여겨져 보기에 좋지 않았다. 자연과 조화를 이룰 아름다운 가람의 건축미를 연등들이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요란한 석물들과 동양최대 또는 세계최대를 지향하는 청동부처님들로 세를 과장하려는, 요즘 절들의 허장성세라 싶어, 아무래도 부처님의 도를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진정 자비로 넘치는, 불심을 느낄 수 있는, 사찰은 어디에 가야 볼 수 있을까나.


우리가 지나온 서래봉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 내장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대웅전 앞의 정혜루


"인생의 묘미" 부분

김소운

...전략... 십여 년 전 ㄱ씨는 '바둑판'을 두고 글 하나를 쓴 적이 있다. 비자나무로 다듬은 일본식 바둑판―단면의 무늬가 고르고 모든 조건에 합격한 1급품은 30년 전 값으로 2천 원. 요즘 시세로는 30∼40만 원은 간다.
  이 1급품 위에 또 하나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용재(用材)1)며 치수며 연륜의 무늬며 어느 점에도 1급품과 다른 데가 없으나, 반면(盤面)2)에 머리카락 만한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것이 '특급품'이다. 물론 값도 1급보다 10퍼센트 정도 비싸다.
  흉이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고 도리어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흥미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공들여서 기른 나무가 바둑판으로 완성될 직전에 예측하지 않은 사고로 금이 가버리는 수가 있다. 1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轉落)할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후는 아니다. 금간 틈으로 먼지나 티가 들지 않도록 헝겊으로 고이 싸서 손가지 않는 곳에 간수해 둔다. 1년 이태, 때로 3년까지 그냥 두어둔다. 추위와 더위가 몇 차례 없이 반복되고, 습기(濕氣)와 건조(乾燥)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새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 대로 유착(癒着)3)해 버리고, 금 갔던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소경은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 금간 그 시련을 이겨내는 바둑판은 열에 하나가 어렵다.
  일어(日語)로 '가야방'이라는 이 비자목 바둑판은 연하고 부드러운 탄력성이 특질이다. 한두 판만 두어도 돌자국으로 반면(盤面)이 얽어 버린다. 그냥 두어 두면 하룻밤 새 본디대로 다시 평평해진다. 돌을 놓을 때의 그 부드러운 감촉, '가야방'이 진중(珍重)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
한 번 금이 갔다가 다시 제 힘으로 붙어진 것은 그 부드럽고 연한 특질을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卒業證書)이다. 하마터면 목침 감이 될 뻔한 비자목 바둑판이 이래서 특급품으로 승격한다.


  ㄱ씨가 말하는 인생의 묘미란 이것이다.
  실패나 불행은 환영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다. 실패와 성공을 몇 차례 없이 거듭하면서, 쓴맛 단맛을 고루고루 겪어 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 만일에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실패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막가는 실패요 불행일 수밖에 없다. 금이 간 채 제 힘으로는 아물지 않는 바둑판 맞잡이이다.
  그러나 ㄱ씨는 믿고 있다. 때로는 그 불행, 그 실패로 해서 한결 더 깊어지는 인생이 있고 정화(淨化)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간이 바둑판만은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하략...



  내장사에서 주차장까지 3km정도를 타박타박 걸어서 내려 오는데, 주차장까지의 포장도로가 산길보다도 더 힘들었다. 한참을 걸어 버스주차장에 도착하니, 우리가 선착이었다. 개울가에서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가 피로를 풀었다. 골짜기 냉기가 계곡물을 따라 스며들어 한기가 느껴졌다. 간편 산행덕에 도착 후 한 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감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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