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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2) 화창한 봄날씨에 마음까지 가벼워 잠깐 짬을 내서 환구단에 들렸다. 화창한 날씨와는 다르게 쌀쌀한 꽃샘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체감 온도가 낮았다. 지난 번에 갔을 땐 흐린 날씨여서 가뜩이나 고층 빌딩들에 에워싸여 움츠려든 것 같은 황궁우 모습이 안스러웠었다. 그래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촬영하고 싶었다.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 주차장 골목으로 들어 섰는데, 골목길은 호텔의 이면도로답지 않게 어수선했다. 골목 끝 계단으로 환구단 경내로 들어섰다. 아침 시간이라 태양의 고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황궁우는 고층빌딩의 그늘에 반쯤 가려져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햇살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내나라에서 홀대받는 환구단을 보다 웅장한 모습으로 표현하려 했으나, 주변 환경 때문에 어찌 할 수 없었다. 골목..
기다림 남녘의 매화 소식에도 불구하고, 기별도 없는 봄꽃을 보기 위해 뒷산에 올랐다. 언제나 제일 먼저 꽃을 피우던 골짜기 양지녘 생강나무로 가서 꽃망울을 살폈다. 일주일 전부터 망울이 잡혔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꽃샘 추위를 겪어서 그런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발걸음을 옮겨 타박타박 산길을 걸었다. 음지쪽에 꽁꽁 얼어 먼지만 폴싹이던 오솔길이 녹아서 질척거렸다. 봄은 언 땅이 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얼었다 녹은 시골 진흙길을 요리저리 피해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까맣게 잊었던 이른 봄의 추억이 떠올랐다. 참으로 봄은 지루하게 찾아온다. 제법 풀린 날씨에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양지녘에선 삼삼오오 무리지어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봄기운을 돋군다. 수북..
등대가 있는 풍경-제부도 선착장 꽃샘바람 심한 날, 제부도 선착장 풍경. 추운 날씨임에도 성급한 상춘객들로 제부도 안이 붐볐다. 2-3년 사이 제부도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제부도에 여러 가지 설비투자를 많이 했나 싶었다. 제부도 서쪽 해안에는 바다 쪽에 나무로 데크를 만들어 관광객들의 보행을 돕고 있었고, 선착장 등대 주변에는 바다낚시터까지 조성해 놓았다. 망둥어가 많이 낚인다는 안내문도 보였고... 등대 아래에서 바라본 누에섬, 전곡항에서 바닷길이 열리면 누에섬까지 걸어갈 수 있다. 제부도 선착장 등대 등대 주변 바다 낚시터 바다낚시터 썰물로 열린 제부도 바닷길
매바위-화성시 제부도 꽃샘추위라던가. 화창한 날씨에 취해서 화성시 제부도에 나갔었다. 때마침 바닷길도 활짝 열려 바닥을 드러낸 시멘트 길을 따라 봄기운을 만끽하며 섬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런,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황해의 꽃샘바람은 거세고 차가웠다. 봄맞이차림의 가벼운 옷차림이 낭패였다. 체감온도가 낮을 것이란 예보가 있어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꽃샘바람은 차갑고 매서웠다. 바람 때문에 눈물이 흘러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피사체가 흐려져 초점 잡기조차 어려웠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제부도의 매바위가 성에 차지 않아 물이 빠진 틈에 매바위 근처까지 다가서서 서해의 갯벌과 우람한 매바위 풍경을 바람 속에 바라보았다. 성급한 상춘객들도 추위 때문에 바위 뒤에 웅크리고 서서 바람을 피했다. 그래도 메뚜기도 한철이라는데... ..
수기 해변 - 시도 신도는 시도, 모도, 장봉도와 함께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에 속해 있다. 신도 선착장부터 시도와 모도까지는 자동차로 돌아다닐 수 있다. 장봉도까지는 다리가 놓이지 않아 배를 타고 더 가야 한다.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처음 가보는 섬여행이라 느낌이 묘했다. 작은 섬들의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아기자기한 서해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의외로 등산하는 사람도 많았고,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 도보 트랙킹하는 사람 등등, 따뜻한 봄햇살에 상춘객들이 제법 많았다. 들머리- 신도 선착장 시도의 최북단 언덕 위에 있는 드라마 '슬픈 연가'의 세트장. '슬픈 연가'는 2005년 mbc 드라마로 권상우와 김희선, 연정훈이 출연했다고 한다. 언덕 위 서북쪽 절벽 해안이라 탁 트인 전망이 좋았다. 북쪽으로 강화도 마니산이 한눈..
서북 항로 신도의 하늘은 쉴 사이 없었다. 요란한 항공기의 굉음이 울리면서 거대한 여객기들이 육중한 동체를 드러내며 영종도 인천공항으로 내려앉았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여객기를 바라보노라면, 문득 낯선 이국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것이 바로 인류 문명발전의 DNA일 테지만... 그런데, 여기서 바라보는 여객기들은 대부분이 영종도를 향해 내려앉는 항공기들이었다.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찾아오거나 귀소하는 사람들이라, 내려앉는 여객기를 바라보는 심회가 사뭇 달랐다.
갈매기와 해협을 건너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신도로 가는 1.8 km 해협을 배를 타고 건넜다. 소요시간은 10 여분으로 가까운 거리였고, 승용차 운임은 대당 왕복 20000원이었다. 거리가 먼 장봉도는 왕복 30000원이다. 신도에서 시도와 모도는 교량으로 이어져 승용차로 일주할 수 있다. 시도에는 해안이 예쁜 수기해변이 있어서 주변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고, 이웃인 모도에는 배미꾸미 해변에 30여 점의 조각이 전시된 작은 공원이 있었다. 바다 바람이 찰 것 같아 선실에 앉았다가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들의 날갯짓에 후다닥 갑판으로 나갔다.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에 화답하며, 배주위를 돌면서 던져주는 새우깡을 찾아 날아들었다. 새우깡을 손에 들고 있으면 두려움 없이 가까이 날아와 날쌔게 새우깡을 찾아 물었다. 새우깡을..
환구단 몇 년 전, 북경에 갔다가 중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천단을 보고, 그 웅대함에 놀란 적이 있었다. 황제는 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니,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고종황제 때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실체를 본 적이 없어 매우 궁금했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환구단을 검색했더니,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었다. 독립된 지역이라는 느낌보다는 호텔의 한 구역같아서, 호텔과 거리가 먼 내 처지에 찾아 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상세히 검색한 후, 서울 시청으로 갔다. 가다 보니, 프레지던트 호텔 옆에 환구단 이정표가 있어서 화살표 방향대로 호텔 옆 호텔 주차장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50여 미터쯤 골목길 끝 부분의 계단을..
남산풍경 날씨가 제법 풀렸다. 그러나,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아직 바람에는 겨울 냄새가 묻어 있었다. 작정하고 오른 것은 아닌데, 남대문길을 걷다 보니 우연히 남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보였다. 어린 시절, 시골 촌놈에겐 남산 케이블카는 엄청난 동경의 대상이었었다. 철들며 까맣게 꿈속에서 사라졌던 그 케이블카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승강장까지 천천히 걸어가 왕복표를 8000원 주고 끊어, 생애 처음으로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팔각정에 올랐다. 서울타워 아래, 드라마에서 가끔 보았던 무수한 자물쇠로 엮인 울타리를 보았다. 저마다의 사연을 적어서 굳게 채워 잠근 자물쇠 뭉치들... 문득, 형형색색의 자물쇠의 주인공들의 현재가 궁금해졌다. 자물쇠를 채울 때의 심정으로 하루들을 살아가야 할 것을... 지나가는 나그네의..
도심 속의 왕릉(선릉과 정릉)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강남 한가운데 선릉과 정릉을 찾았다. 이곳은 본디 한강 남쪽에 자리하여 한적하고 수려한 곳이었겠지만, 현대에 이르러 조국 근대화의 개발정책으로 서울의 최대 번화가인 강남의 한 복판이 되었다. 그 덕에 왕릉은 주변이 훼손되어, 고층빌딩 아래 고개 숙인 모습으로 간신히 왕릉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선조 9 대 성종대왕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완성한 왕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유택인 선릉은 오른쪽 청룡 부분의 산자락이 헐려,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도로 곁에 놓여 있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능은 성종과 중종의 정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듯했으나, 봉분을 감싸는 배산(背山)이 없어져서, 그 역시 허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
화성 반 바퀴-팔달문에서 행궁까지 화성의 남대문인 팔달문을 보러 갔는데, 아직도 보수 중이었다. 서울 숭례문처럼 커다란 겉집 안에서 그 모습을 감춘 채 수리하고 있는 중이어서 아쉬웠다. 겉집 밖에 팔달문의 사진을 크게 붙여 이해를 도왔으나 실물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과거 수원의 중심이었던 남문시장이 있어서, 대부분의 수원시내버스가 이곳을 지나간다. 4통 8달(四通八達)하여 모든 곳의 중심이 되라는 정조대왕의 뜻으로 화성의 主山은 팔달산이 되었고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이 되었다. 팔달문에서 서쪽 방향인 팔달산을 가파른 성벽을 끼고 타박타박 올랐다. 오르는 중간에 홍난파의 '고향의 봄'노래비가 보였다. 한 때 팔달산의 명소로 유명했으나, 홍난파의 친일행적이 드러난 지금에는 그저 빛바랜 비석이 되었나 싶다. 성벽 아래 계단으로 오르는데, 이 성..
연무대와 동북 공심돈 화성의 연무대는 화성의 꽃인 방화수류정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곳에 종합 주차장과 화성 관람 종합 센터, 국궁체험장 등이 있고, 이곳에서 화성열차가 출발한다. 화성에서 제일 넓은 초원이 바로 이곳에 있어, 활쏘기 체험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기도 한다. 1795년(정조 19년)에 지어진 조선 시대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넓은 잔디광장은 현재 국궁 체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무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지붕 구조로 돼 있고, 주변으로는 동북공심돈, 창룡문 등 수원화성의 동쪽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연무대는 말 그대로 군인들의 무예를 훈련하는 곳이다. 논산 훈련소의 이름도 연무대인 것을 생각하면, 화성에서 이곳의 역할은 설명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연무..
화성 창룡문 구름이라도 받쳐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날씨는 쾌청한데, 바람이 셌다. 모처럼 망원줌렌즈를 준비해 갔는데, 구도를 잡을 수 없어서, 광각줌으로 갈아 끼웠다. 표준 줌은 무게 때문에 가져가지 않았다. 시험 못 본 놈이 연필 탓한다고, 렌즈 탓만 할 수 없어, 자주 번갈아 끼우며 촬영했는데, 망원으로는 건진 게 하나도 없었다. 추운 날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불어가며 고생한 것에 비해 소득이 없으니, 조금은 허망했다. 날씨가 춥고 보니,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단체 관광객들은 일본사람들이었다. 얼굴 하얀 백인들은 둘 아니면 셋, 오손도손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이다. 성문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이 옹성 때문에 밖에서는 성문이..
대관령 대관령 바람은 참으로 셌다. 고갯마루에 서니, 내륙으로부터 불어오는 눈 섞인 칼바람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차가운 바람은 두꺼운 방한복 안에까지 파고들었다. 날씨가 맑았으나 하늘빛과 바다가 한 빛이라 수평선을 찾기가 힘들었다. 밖 경치를 두루 즐기려 했으나, 추위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언제나 고개마루에 서면, 아스라이 멀리 바라 보이는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낯 설고 처음 보는 풍경일 땐,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낯익은 풍경일 땐 고향을 찾는 푸근함이 가슴에 전해진다. 오랜만에 옛 대관령을 넘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1. 대관령 너머 강릉 방향 2. 대관령 안쪽 평창 방향
`곰치국`에 대한 단상 십여년 전, 삼척에 들렸을 때, 삼척에 사는 절친으로부터 곰치국 얘기를 들었는데, 비위가 약하면 먹기 어렵다고해서 겁먹고, 대신에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었다. 그 때, 곰치국은 삼척에만 있었던 것으로 생소한 것이었는데, 불과 몇 년 후,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서, 오늘날엔 숙취해소용 음식 중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엊그제 신문에서 송아지 한 마리 일만 원, 곰치 한 마리 12만 원이란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을 보았다. 그 전엔 생긴 모양이 흐물흐물하고 흉칙해서,어물전 천덕꾸러기였던 곰치가, 이젠 없어서 못파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4-5 년 전 낙산에서 1박하며 과음해서, 속초의 유명하단 곰치국집을 찾았는데, 문전성시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좁은 자리에 가슴펴지도 못하고 모잽이로 겨우 앉았는데, 아뿔사, ..
바다가 그리울 때 바다가 그리울 때, 달려가곤 했던 경포해변, 나에게는 바다의 대명사인지도 모르겠다. 넘실대는 파도 가운데 오리 바위 십리 바위는 사시사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주변의 경관은 많이도 바뀌었다. 민박촌과 방가로가 즐비했던 70년대의 추억부터 말끔하게 정비된 오늘까지, 경포해변은 횟집에서 까페까지 현대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 한 때, 여름철 경포는 바가지 상혼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여름 한 철 벌어서 일 년을 먹는다는 말로 바가지 상술을 합리화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여름철에만 찾는 바다가 아니기에 말이 끄는 꽃마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고속도로도 없던 옛시절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대관령을 넘어 여기서 텐트치고 야영도 했었다. 또는 청량리역에서 경북 영주를 지나 강릉에 도착하는 보통급행 야간열차를 타..
눈 오는 밤 눈이 내린다. 인적도 뜸한 겨울 바닷가에 눈이 내린다. 적막감을 깨는 파도소리 위에 어둔 바람을 타고 흰 눈이 내렸다. 멀리 수평선 부근쯤 까만 바다 위에 어선들의 등불이 추억처럼 흔들려 창 안으로 밀려 들었다. 가슴 속에 저며진 젊은 시절들의 애련이 흩뿌려지는 눈 위로 쌓여 갔다. 어항의 작은 횟집 안, 왁자한 원주민들의 걸쭉한 취기들이 낯 설게 다가선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투리에 여행객의 피로감이 밀물결처럼 찾아들었다. 밤은 깊어가고, 눈발은 거세지기에, 내일의 여정은 단정할 수 없었다. 눈오는 밤, 삼척의 밤은 파도 소리 속에 온 몸을 뒤척거리며 그렇게 깊어 갔다.
햇빛바라기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바다, 동해의 격랑이 바위와 해변을 삼킬 듯 밀려들며 부딪혀 물보라를 뿌려댔다. 갈매기들도 비행을 멈추고 저마다 햇볕을 향해 쉬고 있다. 바닷물에 젖은 깃털을 고르며 햇볕을 향해 따스한 햇살을 쬐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갈매기들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떼지어 해를 향해 줄지어 있는 모습들이 우수꽝스럽기도 하면서, 한편 애처러워 보이기도 했다. 춥고 배고플 때, 풍성하고 따스한 햇살만이라도 마음껏 쬘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긴 했지만...문득 나에게도 햇살 따스한 봄이 그리워졌다.
울릉도로 떠나는 길목, 강릉항 경포호수 아래 송정해변에 갔다가 우연히 들렸던 강릉항, 전에는 이곳을 안목항이라 불렀었다. 10년 전쯤 겨울에 이곳 안목항 방파제에서 친구들과 바다낚시를 했었다. 그때 바다낚시 초짜였던 내가 두어 시간 만에 학꽁치를 네 마리나 낚아 올려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했다. 그때 그 생각으로 항구로 들어섰는데, 아아, 상전벽해도 유분수지, 우람한 방파제만 보였던 안목항이 미려한 요트항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잘 정리된 항만 안에 작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고, 수중익선인 쾌속 여객선이 저편에 떠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항구 안을 돌아보았다. 한겨울 거센 해풍이 불어왔다. 추운 탓으로 인적은 끊겼으나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고왔다. 강릉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간다. 처음 듣는 얘기에 여객선 대합..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강릉 경포호 바로 아래의 조선시대불우한 천재 문필가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생가를 찾았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라 문학사적으로도 의의가 깊을 텐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우연히 작년에 1박 2일에 소개되어 몹시 궁금했었다. 허균은 뛰어난 문장가로서 그의 인생편력이 매우 다채롭다. 벼슬길에 나가 기행과 파격으로 부침을 거듭하다 50세에 역모죄로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된 사형수이기도 하다. 허균의 누나인 난설헌은 뛰어난 문장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명성이 높았던 재원이기도 했다. 15살에 안동 김씨 성립과 혼인했으나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아들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피눈물로 한 많은 세상을 살다 27살에 요절한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이 지었다는 조선..
일출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뜨고 진다. 바다는 호흡해야 살 수 있는 생명체 같다. 쉴 새 없이 해안으로 파도를 밀어내 제 육신을 부숴대며 하루들을 살아간다. 현대 인간의 삶은 어쩌면 바다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밖에 나가 세상과 부딪히며 제 몸을 부수며 살아간다. 때로는 알면서도 뛰어나가 부딪히고, 때로는 영문도 모른 채 밀려나가 부딪힌다. 바다의 푸르디푸른 쪽빛 머리가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보라로 산화되어 흩어진다. 흩어진 바다의 포말들은 다시 대지에 떨어져 바다가 된다. 아침에 나갈 때 검은 머리가 세파에 흰머리로 한 올 한 올 산화되어 저물 무렵 귀가한다."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이라고 아침엔 푸른 실 같던 머리칼이 아뿔싸 해가 저물 무렵엔 흰 눈 같은 백발이 되었구나. 영겁..
대관령 양떼목장 밤새 전국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에 태백행을 포기하고 대관령을 찾았다. 강릉에서 대관령 오르는 길에도 눈은 쌓여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녘 비탈엔 눈이 녹아 질척거렸지만, 굽이굽이 커브길 응달은 빙판 그대로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대관령에 올랐다. 잠깐 대관령 옛길로 내려가는 길목에 주차하고 동해를 바라보았으나, 사나운 강풍에 눈물만 흘리고 10 분도 버티지 못하고 차 안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의 여행길이 폭설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옛 대관령에 올라 양떼목장 입구로 갔더니 벌써 많은 차량들이 있었다. 차 안에서 두툼한 방한복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휴게소로 갔다. 안에 들어가 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대관령 강풍에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어떤 이는 스페츠에 아이젠까지 하고..
동해 추암 촛대 바위 언제나 동해에 서면 가슴이 울렁인다. 깊고 푸른 망망대해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으로부터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의 숨결 하나만으로도 벅차게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푸른 수평선 위로 뭉게구름이라도 걸릴 양이면 가슴은 풍선처럼 마냥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소년시대를 훨씬 지나 반세기 이상의 삶을 살아온 지금에도 출렁이는 파도와 흰 뭉게구름, 짙푸른 수평선 위로 날아다니는 순백의 갈매기들은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TV방송 시작과 끝에 나오는 애국가 중 동해 일출 장면으로 유명한 추암의 촛대 바위, 겨울바다답게 세찬 바람이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왔다. 추운 날씨 덕에 인적도 뜸했다. 해안 방어선으로 처 놓은 흉물스러운 철조망들이 눈에 거슬렸다. 빨간 아치 철교를 건너 70년대 풍의 작은 어물전..
관동제일루 죽서루 "......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에 다히고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죽서루 부분인데, 송강의 노래대로 태백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곳 오십천 구비를 휘돌아 동해로 흐른다. 그 오십천 벼랑 위, 암반 위에 팔작지붕의 긴 다락을 짓고, 자연을 벗 삼고 희롱하던 선비들의 풍류가 저절로 그려진다. 죽서루 방문은 수차례였지만, 이 번엔 죽서루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절벽의 험한 바위에 눈이 내려 미끄럽고 위험했다. 게다가 날씨도 추워 장갑 낀 손끝이 아렸다. 밤사이 서울과 중부지방엔 폭설이 내려 교통 대란과 혹한이 찾아들어 아우성이라는데, 이곳엔 희고도 고운 백설이 살짝 뿌리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영월로 가려던 계획..
선암사 가는 길 순천에는 볼 것도 참 많다. 순천만에다 낙안읍성이며, 송광사, 그리고 선암사까지... 얼마 전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님이 TV 무르팍 도사 출연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곳이 선암사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후 선암사를 찾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나야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전문 지식이 있어서 건축물이나 가람의 배치를 보고 탄성을 지를만한 처지도 아니지만, 들어가는 길의 강선교와 승천루의 절묘한 조화는 익히 사진으로 본 바가 있어 무척이나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방문했을 때는 늦은 오후시간인데가 겨울답지 않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구름까지 낮게 드리운 까닭에 보이는 풍광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방문..
홍사용문학관 잔뜩 흐린 하늘에 겨울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는 가운데 화성시 동탄 신도시 초입에 있는 홍사용 시인의 문학관을 찾았다. 진작부터 방문하고자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던 터였다. 홍사용 시인은 이곳 동탄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100일 만에 무관학교 1기에 합격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재동으로 옮겨 살다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시 화성으로 이사하여 17세 때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철유(哲裕)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
보령시 천북 굴구이 가을과 겨울, 두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굴 구이. 그 맛을 잊지 못해 일 년에 한 번쯤은 이곳에 들린다. 10여 년 전, 처음 굴구이 단지가 조성되었을 땐, 가건물 안에서 굴구이 판을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 굴을 구워 먹었었다. 아직도 가건물로 대도시 식당만큼 훌륭하지는 않지만, 제법 식탁과 의자까지 갖춰져 펀안하게 먹을 수 있다.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져 공휴일엔 그야말로 문전성시 인산인해다. 수도권인 대부도 인근에서도 굴구이를 하고 있던데, 질과 양으로 따져도 이곳 천북 굴구이를 따를 수 없다. 굴구이판 위에 두세 개가 맞붙은 굴을 수북이 쌓아놓고 불을 지핀 후 잠시 기다리면, 화약 터지듯 굴구이 판 이곳저곳에서 굳게 다문 굴 입술이 팍팍 터지며 열린다. 지글지글 껍질 안에서 익어가는 큼직한 굴을 ..
강화 마니산 신년들어 두번 째 산행은 강화도 마니산, 일요일 강화까지 교통이 걱정이어서 목적지를 바꿀까도 생각했었는데, 다른 곳도 별 뾰족한 대책이 없어 그대로행을 강행했다. 비교적 산행이 순탄하다는 화도면 상방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경이었다. 주차장엔 벌써 등산객들로 인산인해였다.그들과 휩쓸려 매표소에 들려 1500원씩 입장료를 내고 산행을 시작했는데, 입구 직원으로부터 마침 참성단을 개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 번 올랐을 땐 정원 초하루와 개천절, 또는 특별한 날 며칠만 개방한다고 해서 그 아래녘에서 스쳐 지나쳐서 매우 아쉬웠었다.이침 일찍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싶어 기대감이 부풀었다. 등반길은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하나는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었다. 북서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