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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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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 봄기운이 완연한 일요일,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의 배경이기도 한 안성 칠장사를 찾았다. 십몇 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라 옛 기억을 떠올렸는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륙에 있는 탓인지, 봄기운이 늦은 감 있었는데, 가족들과 나들이 오신 관람객들이 의외로 많았다. 고려 때 혜소국사(慧炤國師)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니 이들은 일심정진해 도를 깨달았기에, 산이름은 칠현산, 절이름은 칠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 옆의 일주문. 일주문 옆에 도로가 나 있어 웬일인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절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근년에 지어진 듯하지만 소박한 모습이었다. 일주문 바로 위의 천왕문이다. 대웅전 좌측 건물 벽화. 태봉국의 궁예왕이 13세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특히 활을 잘 ..
화성시 제부도 밀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고, 썰물로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섬, 제부도. 우리나라엔 그런 곳이 꽤 많이 있지요.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제부도입니다. 수도권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유명해진 탓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그 덕에 섬의 서쪽 해안에는 횟집과 놀이 시설, 모텔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차라리 계획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지면, 모양새는 보다 좋아질 텐데, 난개발이라 어수선합니다. 2-30 년 전 한가로운 서해안 어촌이었을 때가 더 낭만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이 섬에서 하룻밤을 텐트 치고 자면서, 주민들에게 맛조개를 사서 삶아 먹다가 진주 알을 씹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놀라고 신기했던지, 그 진주 알을 고이 간직하다가 값을 물으니 상품성이 전혀 없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해남 땅끝마을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 지금은 완도가 연륙되어 땅끝의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땅끝마을"이란 지역이름은 성공작으로 생각이다. 조그마한 포구에 불과한 이 마을이 대한민국 유명 관광지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런 동네가 꽤 있다. 동쪽으로 최동쪽이라는 호미곶도 그렇다, 삼척에 가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부인 이야기의 배경을 자기 마을이라고 주장하여 기념물까지 세워둔 임해정, 헌화로도 있다. 이 밖에도 홍길동 마을, 흥부 마을도 비슷한 경우로 생각한다. 타당성이 있으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조작성이 농후할 땐, 보는 기분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이번 이곳 방문에 세 번 째지만, 전에는 부두 구경도 하지 않고 횟집에서 회만 먹고 스쳐 지나간 듯 싶다. 왜냐하면, 바닷가에 그 흔한 조그마한 포구와 차..
김해수로왕릉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그 유명한 가락국 건국신화 중, 김수로왕을 맞이하며 불렀다는 '영신군가'이다. 신화와 역사속의 가락국 시조이자 현전하는 김해김씨 시조인 수로왕릉 참배를 위해 김해를 찾았다. 김수로 왕릉에 도착했을 땐 오전 8시밖에 안된 이른 시간이라 능문이 잠겨 있었다. 지키는 분에게 들어가기를 청했더니, 9시가 지나야 한다는 거였다. 9시에 능참봉이 수로왕께 참배를 마쳐야 비로소 능문을 연다는 거다. 왕조시대도 아님에도 현실에서 듣는 능참봉 이야기가 퍽이나 재미있었다.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나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추운 날 일찍 조반을 파는 집을 찾을 수 없어서 한참을 배회하다가 시장 안 깊숙히 들어 가서야, 복국 끓이는 집을 겨우 찾았다...
오천城 보령시 오천城, 오천항, 토정 이지함의 묘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성. 1509년(중종 4)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서해를 통해 침입해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쌓았으며 1896년(고종 33) 폐영되었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 때에는 중국·일본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로 알려졌으며 고려 때부터는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군선(軍船)을 두었다. 축성 당시에는 사방에 4대 성문과 소서문(小西門)이 있었다는데,동헌을 포함해영보정(永保亭)·대섭루(待燮樓)·관덕정(觀德亭)·능허각(凌虛閣) 등의 건물은 허물어져 사라졌고 서문인 망화문(望華門)을 비롯해 진휼청(賑恤廳)·장교청(將校廳)·공해관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망화문은 화강암의 아치형 출..
순천만 순천만 자연생태관, 천문대와 전시관 건물로 주변과 잘 어울렸다. 주차장 시설이며, 공원들이 예뻐 보였다. 자연 생태관에서 구름다리를 건너면 갯벌의 갈대밭이 나타난다. 갈대밭 사이로 나무 산책로를 만들었다. 전망대에 가려고 했으나, 현재 공사중이었다. 전망대 직전, 임시 전망대에서 순천만을 조망하였다. 임시전망대는 앞에 큰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전망이 그리 좋지 않았다. 갈대밭 입구, 순천만 사진
자갈치와 광복동 소싯적에 친구들과 자갈치 시장에 갔었는데, 그땐 좌판마다 붕장어가 넘치고 있었다. 그 시절, 불행하게도 부산역 앞 아리랑 호텔 길 건너 선술집에서 조총련 재일동포 모국방문단이라는 자칭"신따로"라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었다. 부산도착 첫날이라 정말 난감했었는데, 모두의 돈을 털어보니 겨우 집으로 돌아갈 여비만 있었다. 자갈치 좌판마다 하얗게 썰어 놓은 붕장어회를 눈으로만 바라보며 침만 삼키고 돌아서서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값싼 홍합국물로 배를 채웠었다. 오늘 자갈치시장은 옛 모습과 달리 현대식 건물이 떡 버티고 있어 놀랐지만, 안에 들어가니 재래 수산물시장과 비슷했다. 시장 들어가는 초입에는 고래고기 파는 식당이 많았다. 시장 건물 앞은 그저 평범했다. 좁은 길에 차량들이 붐볐고, 바닷물이 바닥에 흥건히 젖..
봉하마을 전설의 마을, 봉하. 고인께서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실 때, 먼발치로라나 뵈었어야 했을 것을 돌아가신 뒤에야 찾았다. 대통령 생가와 봉화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통령이 계시지 않는 마을은 겨울의 따스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쓸쓸해 보였다. 복원한 노대통령생가와 새로 마련하신 저택. 담장 안의 복원 생가. 대청 마루 벽에 걸려있는 사진, 대통령의 어린 시절, 군시절, 결혼 사진들... 사랑방. 횃대에 걸린 옷가지와 물레, 등잔불. 옛날 유년의 추억들이 물씬 피어올랐다. 봉화산으로 가는 길, 방문객들을 위한 추모의 공간. 이 뒤편에 고인의 유언대로 자그마한 비석을 건립한다고 한다. 공사가 한창이었다. 뒤편의 봉화산 사자바위 생전 마지막 오르셨던 부엉이 바위. 바위 밑에는 추모의 리본이 고인과 함께 ..
`추노(推奴)`- 청풍호 9월 13일 충북 제천부근의 청풍호. 일지매 세트장 쪽에서 농악소리가 울려 내려갔다. 장터 어물전의 굴비들이 눈을 부릅뜨고 올려다보았다. KBS 촬영차량이 있어 호기심에 가까이 갔더니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었다. 스텝들에게 물으니, "추노"라고 말하길래, 호기심에 카메라를 들자, 스텝이 달려와서 찍지 못하게 했다. 멀리서 적당히 몇 장 찍었다. 최대로 줌인했더니 장혁이 보였다. 장터 활극 장면이어서 몇 장 찍는데, 또, 스텝들의 제지를 받았다. 머쓱하고 무안해서, 촬영을 포기하고 카메라를 접었다. 세트장 한 부분 촬영 현장을 보았다는 것외 별로 신통한 것도 없었다. 연결되지도 않는 몇 개의 씬을 보다가 지루하고 재미없어 되돌아 나왔다. 청풍단지에서 아래를 보니 청풍호에서 분수가 시원하게 솟구쳐 올랐다.
영월 청령포와 장릉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는 여기서 단종이 돌아간 줄 알았었는데, 이곳에서 지낸 것은 1457년 6월부터 두 달이었다고 한다. 유배 중 여름 장맛비에 청령포가 범람하자, 영월읍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겼다가, 그해 10월에 그곳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17살, 어린 소년이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지형으로 유배지의 전형이었다. 나루터에는 청령포를 건너는 배 두 척이 여행객을 맞아 좁은 강폭을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넌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의 넓지 않은 강이었다. 동력선이 방향을 바꾸어 건너편에 접안하는 시간이 오히려 지루할 정도로 강폭은 좁았다. 영조대왕이 친필로 썼다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이다. 단종이 ..
오산 독산성(세마대) 임진왜란의 유적지인 오산시 독산성 세마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성안에 물이 많음을 과장하기 위해 왜적이 볼 수 있는 성위에서 흰쌀로 말을 씻었다는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의 현장치고 복원 수준이 요란하지 않고 그저 수수한 시골 토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세마대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독산성 서문,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한 바퀴 일주한다. 서문에서 북쪽으로 오르는 길 성벽의 높이는 높지 않으나, 성밖의 경사가 매우 급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아카시아 나무 숲이 우거져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북쪽 성벽 아래에 한신대가 있다. 북쪽 성벽의 암문. 이 역시 거창하게 축성한 것이 아니어서 매우 얌전해 보인다..
아산 공세리성당 아산만 방조제를 조금 지나 평택만과 삽교천 언덕에 있는 공세리 성당. 이 성당은 1922년에 드비즈 초대 본당 신부님이 직접 설계하여 완공하였다. 본디 세곡 창고가 있던 자리에다 성당을 지었는데, 공세리란 지명도 세곡 바치던 창고가 있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세 유럽풍의 이 성당은 아름다워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고스트 맘마', 드라마 '모래시계' '불새' 등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그래서인지 평일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성당을 방문하고 있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국군병원으로, 부상당했던 원빈이 원대복귀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고풍스러운 성당의 내부. 1800년대 후반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신 28분의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 안장되신 28분은 아산에 사시던 분들로 서울과..
남산골 한옥마을 09년 7월 30일 남산골 한옥마을. 뜨거운 날씨였지만 방문객들이 많았다. 동아시아인들은 외양으론 구별이 안되어 말소리로 알 수 있겠는데, 중국사람들이 많아, 한옥마을이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중요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한옥마을 입구 안내문에는 이곳은 원래 맑은 계곡물이 흘러 푸른 학이 살고 있어 청학동이라 불리던 곳이린다. 이곳에 옛 정취를 살리고자 정자를 짓고 사대부 집과 평민의 집, 모두 다섯 채를 옮겨 한옥마을을 조성했노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역사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에겐 보존된 옛것들이 너무 적다. 이 한옥마을의 첫인상도 박제된 마을 같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한국의 전통미를 찾아보려면 서울은 불가능할 것 같고, 안동이나 가야 살아 숨 쉬는 전통가옥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속촌이나 박물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