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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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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조선왕릉을 찾아다니다 보니, 마지막 왕인 고종과 순종의 능에도 관심이 생겼다. 고종과 순종의 능은 그리 멀지 않은 남양주 금곡에 있다. 고종은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를 부여 안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정부 관리들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열강들의 견제와 간섭에 결국 국권을 잃고 말았다.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청나라를 상대로 싸워 이긴 일제는 강제병합으로 500년 조선왕조에 굴욕적 최후를 안겨 주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나라 잃고 망국민이 돼버린 조선의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었을까. 나라 잃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는 달리 일제와 야합한 매국노 친일파들이 부귀호사를 누리며, 활개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홍유릉은 조선조 마지막 왕인 고종과 비운의 명..
동구릉(2) 지난 번 갔었던 동구릉을 다시 찾았다. 오후 네시 무렵이라 햇살도 이미 기울기 시작했고, 바람이 쌀쌀해져서 스산한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때마침 문화해설사를 만나 태조의 건원릉과 선조대왕의 목릉까지 설명을 들었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왕릉에 대한 예절이며, 제사상 음식의 의미들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다. 이를테면, 정자각 계단에 오를 때면 오른발이 먼저 올라가고, 왼발이 그 뒤를 따르며, 내려올 때는 반대로 왼발의 뒤를 오른발이 따른다는 것과 제사상에 올리는 대추의 의미는 씨가 하나라 제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밤은 그 밤톨이 뿌리 끝에 매달려 있어서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며, 밤송이 안의 밤톨이 보통 세 알이라 삼정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곶감을 놓는 것은 감씨가 육쪽이라 육판서를 상징하여 후..
서오릉(2) 매표소에서 바로 입장하면, 작은 광장과 쉼터가 있고, 작은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수경원 이정표를 보고 우측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순행코스이다. 입구에서 얻은 안내서를 보며, 수경원-익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을 차례로 찾았다. 관람객들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한적한 오솔길을 걸었다. 맑은 하늘, 상쾌한 바람, 선선한 날씨 산책도, 명상도, 상상하기도 좋은 청명한 숲길을 내내 그렇게 걸었다. 1. 수경원 -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의 묘 서오릉에서 처음 만나는 능원이 수경원인데, 영조의 후궁이자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이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
서오릉(1)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는 조선 왕조의 다섯 능으로,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말한다. 이외에도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과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수경원,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묘역이 크게 둘로 나뉘어 숙종대왕의 명릉은 매표소 맞은 편에 뚝 떨어져 있고, 명릉을 돌아 나와서 다시 입장하는 불편이 있었다. 주차장이 비좁아 휴일이나, 공휴일에는 차량주차가 어려울 것 같다. 주변에 주차장을 갖춘 식당들이 많아, 식당주차장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명릉은 서오릉을 대표할 수 있는 숙종대왕의 능인데, 서오릉은 숙종과 관련된 여인들이 숙빈 최씨를 빼고..
동구릉 조선의 역사를 실감할 수 있는 곳, 동구릉을 찾았다. 동구릉은 한양의 동쪽, 즉, 구리시에 조선왕조의 아홉 릉이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왕릉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맞아 국가의 위기를 맞았던 제14대 선조의 목릉, 당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근대화의 불씨를 지폈던 제21대 영조대왕의 원릉과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의 아버지 문종의 현릉들이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는 길을 검색하니 잠실역 6번 출구에서 1115-6버스를 타면 입구까지 갈 수 있단다. 잠실역 6번 출구 앞에서 막상 버스를 타려고 하니까, 기사님이 승차장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초행길이라 태워준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승차장소는 잠실역 9번 출구 앞이란다. 환승지에서 버..
사육신 묘 죽림님의 블로그에서 "사육신 묘"를 보고, 단숨에 달려갔다. 구름이 많아 날씨는 썩 좋지 않았다. 묘역에 있는 동안 먹구름이 몰려들어 행여 비가 내리지 않을까 노심초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일까?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그중에 권력에 대한 탐욕과 집착이 서럽게 가슴을 친다. 권력에 대한 욕심에는 인정사정이 없어 혈육조차 개의하지 않는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어린 단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좌의정 김종서 부자를 참살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이었던 안평대군마저 죽이고,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아버지의 충신들을 악랄한 고문 끝에 참살하고, 그 충신들의 가족 중 남자들은 모두 몰살하고, 여자들은 노비로 몰아버렸다. 그리고는 수족 떨어진,..
일출과 일몰의 명소, 당진 왜목마을 바다 위 일출과 일몰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당진 왜목마을. 게으른 탓으로 직접 일출과 일몰을 볼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며, 구름이 간간이 몰려들었지만,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빛이 유난히 고와 보였다. 수년 전, 바람이 세차게 불던 겨울날, 외투깃을 세우며, 서있었던 시멘트 선창에서 삼면을 둘러보았다. 맑고 깨끗해 보이는 바다 위에는 낚싯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고, 바닷물 빠져나간 뻘밭에는 철 늦은 피서를 즐기는 피서객들이 조개를 캐며 한낮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왜목항에는 수많은 차량들로 차댈 곳도 없어 한참을 헤맨 후에야 공터 한구석에 겨우 주차할 수 있었다. 북적이는 관광객들로 넘치는 한편, 왜목항 주변..
화성시 송산 공룡알 화석산지(2) 화성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것은 시화 방조제 건설 이후이다. 방조제를 막음으로써 바다가 육지가 되었다. 바닷물에 깎여 나가던 바위가 드러나면서, 공룡알이 발견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던 공룡화석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다. 2008년 5월에 전곡항 방파제를 걷던 여성(공무원)이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다니던, 축대돌에서 화석을 발견했단다. 최초로 발견된 이 공룡화석을 토대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공룡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데, 그분의 이름과 사진이라도 남겨 기념했어야 했을 텐데, 더 이상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외국의 경우 최초 벌견자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기도 하던데... 아무튼 위대한 발견이었다. 화성시 송산면 공룡산지 방문자 센터 - 입장료와 주차료 모두 없고, 우리..
화성시 송산 공룡알 화석산지(1) 망가져 간다는 우음도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찾았다. 멀지도 않은 곳이라 훼손되고 나면 이름난 명소를 다시 볼 수 없겠다는 안타까움 이조바심을 내게 했는지 모르겠다. 우음도는 시화방조제 안에 있는 옛적의 섬이었다. 가는 길이 공교롭게도 공룡알 화석 출토지를 경유하는 길이어서 너무 좋았다. 화성시 송산동 사강에서 우회전하여 한참 들어가니, 공룡화석지 안내 이정표들이 나타났다. 방조제를 막기 이전엔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던 뻘 가운데 비포장 도로에 들어섰다. 그곳엔 송산 그린시티 건설을 위한 도로 공사가 광활한 뻘밭을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빗물로 파여 울퉁불퉁한 도로를 곡예하듯 달려가니, 말로만 들었던 화성 공룡알 화석산지 방문자 센터가 나타났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방문자 센터 안에 ..
아산 공세리 성당 지나가는 길에 들른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천주교. 동산 위의 우뚝 선 첨탑이 석양빛에 빛났다. 차를 샛길로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 위에 올랐다. 1922년, 초대 드비즈 본당 신부님이 직접 설계하여 완공했다는 본당 건물로 중세 유럽풍으로 매우 아름다웠다. 본당 내부는 공개하지 않아 애석하게도 들어가지 못했다. 성모 마리아 상 왼편으로 뚫린 하늘의 모습이 우연하게도 하트 모양이었다. 1800년대 아산지방에서 순교하신 28명을 모시고 있는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좌로부터 성당 측면과 성모 마리아상, 순교자 추모비, 박물관이다. 저녁 무렵이라 사진이 어둡다. 더군다나 구름 속의 석양을 바라보고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흐린 하늘빛마저 제대로 표현되지 않고, 색감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기념으로 올려..
세미원(洗美苑) 두물머리에서 벗어나 장터 구경 후, 다리 건너에 있는 세미원으로 갔다. 洗美苑이란 이름이 너무 예쁘다. 물과 연꽃들을 보고 마음을 씻어내면 어떤 경지일까. 씻고 씻으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無의 세계, 즉 色是空의 세계는 아닐까. 입장료 3000 원을 내고 표를 끊으니, 입장권은 관람 후에 음료나 선물로 교환해 주니까 절대 버리지 말란다.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모두가 한 푼이라도 더 뜯으려고 야단인데, 이런 서비스로 관람객들에게 베푸니, 세미원을 만들고 이런 배려까지 해주는 양평 지자체 사람들이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원 4층 건물은 연꽃 박물관이란 현판을 달았다. 세미원 입구, 뒤 건물은 연꽃 박물관 매표소, 매표소 뒤의 출입문에는 태극기 문양이 그려졌고, 그 문 이름은 不二門..
두물머리 양평 두물머리 끝에서 두 강이 합수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포인트를 찾지 못해서 뜨거운 땡볕만 받다가 허망하게 철수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땀이 흘러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차가운 음료수 하나로 갈증을 달래었다. 때마침 양수리 장날이어서 장터를 조금 기웃거리다가 그것도 이내 지쳐, 민생고 해결차 들린 장터 식당 에어컨 바람으로 몸을 조금 추스를 수 있었다. 안 쪽으로 파인 곳의 물은 흐르지 못해서 탁하고 부유물이 떠 있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만, 관리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무렇게나 매어 놓은 거룻배 역시, 낭만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조금만 신경을 더 쓰면,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찾으려 애쓰지만, 적당한 곳은 없었..
충남 서천 홍원항 오직 회를 먹으러 홍원항에 갔었다.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에 있는 홍원항은 어항으로 규모가 제법 크다. 한적한 시골 어촌 마을을 뛰어넘어, 덩치 큰 어선들이 대부분이었다. 금년 들어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접때도 날씨가 흐리고 빗발이 보였는데, 이번에 역시 빗줄기가 오락가락한다. 인근에 동백정이 유명하다고 해서 방문했다가, 정자 바로 옆의 화력발전소를 보고는 망가져버린 풍경에 퍽이나 실망했었다. 그때, 이 홍원항에 들러 횟감을 사려다 시간이 맞지 않아 갈 길로 되돌아갔었다. 그것이 회한이 되어, 이번 방문에는 오직 횟감을 구하기 위하여 활어시장으로 갔다. 무쏘승용차가 바퀴 달린 받침대 위에 보트를 싣고 끌고 있었다. 나도 한 때 저런 로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푸른 파도를 헤치며 흰 물살 자취를 흩뿌..
진주성 비는 멎었으나,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 내릴 것만 같았다. 북상 중 서진주 IC로 빠져, 진주성을 경유지로 삼아 이 고장에 들렸다. 이곳 역시 임진왜란과 뗄 수 없는 고장이다. 진주 시내는 의외로 깔끔했다. 높지 않은 건축물들로 잘 정돈된 시가가 매우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 진주성 방문은 이 번이 두 번째, 그 사이가 20년이 넘었나 보다. 촉석루 아래 논개 바위인 의암 위에서 서남방향의 남강을 바라 보았다. 진주성의 주출입문인 공북문 김시민 장군 동상- 이 분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김시민 장군은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
전라우수영 전적지 2005년에 왔을 땐 진도대교는 외다리였는데, 그사이 쌍다리가 되었다. 진도 주민들의 교통이 편리 해졌겠다. 진도에서 대교를 건너면 해남군이다. 오른편으로 전라 우수영 전적지가 보인다. 잠깐 주차한 후, 충무공을 기리는 여러 가지 기념물들을 둘러보았다.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는 '명량대첩'의 전승지가 바로 이곳이다. 1597년 9월 16일(음력)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왜적선 133척을 수장시켜, 왜적의 서해진출을 좌절시켰다. 원균의 견내랑 패전을 통쾌히 되갚은 승리였는데, 빠른 물살과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 장군의 전략이 승리의 바탕이었다. 명량대첩탑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이 대첩비는 영원히 이 길목에서 그 위용을 빛낼 것이다.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위하여, 파..
진도 회동, 벽파진 팽목항에서 진도 동남쪽의 회동 '신비의 바닷길'로 향하는 도중, 내비게이션 오류로 잠깐의 혼란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직접 길을 물어, 목적지를 수정할 수 있었다. 바닷길이 열린다는 회동, 뽕 할머니상 앞에서 하차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미 수년 전 방문했던 곳이라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할머니 상 앞으로 보이는 섬까지 바닷물이 열린다. 그래서 이곳을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도 한단다. 1. 신비의 바닷길 누군가가 뽕할머니를 위해 음료수와 사탕을 올려놓았다. 호랑이 석상 뒤로 보이는 곳은 진도 학생 수련원이 있는 해수욕장으로 야영하기에 매우 편리한 시설을 갖추었다. 2. 벽파진 기념비 회동에서 진도를 나가는 길목에서 벽파진에 들러, 충무공의 명량대첩을 이루신 벽파진기념비를..
진도 대몽항전 유적지 팽목항을 가던 도중 이정표를 보고 따라간 곳은 굴포의 배중손 장군의 사당이었다. 배중손 장군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려 무인 정권 말기의 장수로 몽고 침략 시 삼별초로 반몽세력을 규합하여 이곳 진도에서 대몽항전을 벌였다. 제주도를 배후 기지로 확보하여 왜와 연합하여 항전하였으나, 끝내 몽고 진압군에게 진도가 함락되어 삼별초, 배중손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1. 배중손 사당 2. 남도석성 고려 원종(元宗) 때 배중손(裵仲孫)이 진도에 와서 1270∼1273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
진도 세방 낙조 전망대 진도읍에서 하룻밤 숙박을 했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숙박지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 많은 곳이면 따르는 불친절함에 운림산방에서의 아름다웠던 감흥이 사라져 갔다. 퉁명스런 표정과 쇳소리 섞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방값을 흥정하던 진도 교육청 부근의 모텔 여주인의 냉랭함이 가슴을 쳤다. 결코 편안하지 않을 숙박지 같아서 방을 나와 몇 군데를 찾아다녔으나 업소주인들의 불친절은 대동소이했다. 겨우 찾아든 모텔 방안엔 선풍기가 고장 나 있었다. 선풍기 날개가 보호망을 스치며 뼈를 가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무성의가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아 서럽기까지 했다. 덕분에 집에서는 전기세 아까워 잘 켜지 않던 에어컨을 밤새 틀어놓고 잤다. 한밤 중에..
운림산방(雲林山房) 먹구름 속에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남도의 끝자락 진도 속의 운림산방에 섰다. 짙은 구름 탓으로 6시 조금 지난 저녁 무렵 산방은 벌써부터 어두워지고 있었다. 남도로 내려오는 찻속에서 우연히 생각해 낸 운림산방이었었다. 조선의 산수화에 대하여 아는 것은 없지만 조선말 남도화의 대가 소치 허련 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라 진도의 첫 번째, 방문지로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산방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퇴근 후라서, 산방 아래 남도전통미술관도 문을 닫았다. 미술관 옆 계단을 따라 주인 없는 산방을 때늦은 나그네들과 함께 찾아들었다. 산방은 잘 정비된 공원처럼 뒷산을 안산으로 하고, 단아한 연옆들이 뿌리를 내려 연꽃과 열매를 맺는 연못을 앞에 두고, 선생의 작업실과 집이 그림처럼 들어앉았다. 선생을 추..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기념관을 4월에 준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현충사를 찾았다. 현충사 경내에 흙을 올려 봉분 모양의 기념관을 지었다. 기념관 안에는 예전에 현충사 사당 바로 아래 있던 유품들을 옮겨 전시하고 있었고, 각종 자료들을 영상물로 전시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지하 2층에서는 충무공 영화를 4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무료로 보여 주었다. 4D 애니메이션이란 호기심 때문에 들어가서 구경했는데, 놀이동산 입체 영화관처럼, 3D 입체 영화에 의자가 움직이고, 해전 장면에서 의자 앞 파이프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현실감을 더해 주었다. 박대통령 시절에 성역화되었기에 명암이 있는 곳이지만, 충무공을 기리며 하루를 산책하며 보낼 수 있는 겨레의 성지이기에 방문할 때마다 ..
여주 영릉 신륵사에서 아쉬웠던 마음을 온천에서 씻어내고, 세종대왕 영릉에 갔다. 4대 강 공사로 막은 수중보 때문에 세종대왕의 묏자리에 물이 찰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강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내 보기에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묘역에 들어서자마자 도로 양쪽에 철판으로 울타리를 둘러놓아 울창한 솔숲들을 볼 수 없었다. 무슨 유물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장 울타리라고 하는데, 왜 이리 가는 곳곳마다 공사판인지 모르겠다. 세종대왕의 사당인 정자각, 그리고 능묘인 영릉. 정자각 지붕 영릉 좌측 영릉 앞의 무인석 문인석 영릉 우측에서 정자각 방향 영릉 바로 아래 정자각 뒷면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수랏간과 정자각, 그 사이로 영릉. 세종대왕 당시 제작했던 여러가지 관측기구 영릉..
명성왕후 생가 날 맑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 여주에 있는 명성왕후 생가를 찾았다. 비운의 왕후, 명성왕후 생가는 여주 나들목 근처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주 나들목을 빠져나가자마자 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해서 700m 정도 달리면 바로 왕후가 태어난 곳이었다. 생가에 도착하기 전에 커다란 고택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생가인줄 알고 담벽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들어갔다. 들어가려다 보니 매표소가 있었는데, 생가는 100m 정도 더 가야 한단다. 주차료 1000원, 입장료 1인당 1000원을 지불하고 고택 먼저 들렸다. 처음 보았던 고택은 감고당이란 현판을 대문 위에 걸었다. 고택의 대문 앞에 흙더미가 쌓여 있어 전경사진은 생략했다. 1. 감고당(感古堂 ) 조선시대 제 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
대관령 옛길 대관령 아흔 아홉 구비, 엣 사람들은 이 길을 걸어 넘었다. 현대에 이르러 옛 차도를 넓혔던 영동 고속도로가 개통되더니, 이젠 터널을 뻥뻥 뚫어 평탄한 4차선 고속도로로 많은 차량들이 쌩쌩 달려 나간다. 옛 사람들이 걸었다는 그 길은 이젠 등산로가 되어 향수를 더듬는 등반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버스로 대관령을 넘은 뒤, 대관령 옛길 시작점에서 대관령 박물관까지 약 5km를 걸어서 내려 갔다. 내리막길이 숲길이었기에 숲만 바라보며, 시종 그늘진 길을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다. 길도 험하지 않았고 계곡의 물이 맑고 시원하게 흐르고 있어 간단한 도보 산책으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출발 시작점에서 굽어본 강릉시와 동해. 연무 때문에 시계가 좋지 않았다. 맑은 계곡물에 발도 닦으며 걸었다. 옛날 주막이 있었다는 ..
재인폭포 주차장에서 계단으로 협곡 아래로 내려가 바윗길을 조심조심 올라가노라면 폭포가 나타나는데, 물은 맑고 깨끗하지 않았다. 군부대 관리지역이라 관광지답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다. 바위틈을 조심해서 걸어 상류 쪽으로 조금 오르니 폭포가 나타났고, 그 아래엔 사람들이 엉성하게 쌓아 놓은, 작은 돌탑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이런 오지까지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가기 섭섭해서일까? 아마도 저 마다의 소망을 빌며 정성껏 하나둘 쌓았으리라. 동네 입구에도, 산길에도, 강가에도, 폭포 아래에도 이런 돌탑을 쌓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정성과 소망이 많은 백성들인가 보았다. 폭포 주변의 암벽은 주상절리였다. 절벽 아래 풍화작용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 절리의 파편들이 어지러이 뒹굴고 있었다. 폭포 가까운 곳에 홍수조절..
선사 유적지를 찾아서... 1구석기 선사유적지가 있는 연천군 전곡리에서는 구석기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 때 방문하면 볼거리가 많아야 하는데도, 푸대접 받는 기분은 왜일까? 수많은 차량들이 어지럽게 몰려 들었고, 주차장 주변에는 각설이 품바타령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울긋불긋한 잡상인들의 노점들이 난장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차량을 유도하는 경찰들과 해병전우회원들의 호루루기 소리가 정신을 쏙 빼놓았다.축제라면 모든 사람들이 흥겹고 신나야 할 텐데, 소수의 귀빈들만이 그들의 실적을 빛내고, 일반 서민들은 어수선한 둘러리가 되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중심 행사장인선사유적지를 돌아본 뒤, 금년 4월에 개관했다는 전곡 선사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건물은 공상영화에 나오는우주선모양으로 금속 건물이었다. 전시물은 대..
고창읍성 강풍과 호우가 예보되는 가운데, 읍성 가까운 곳으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읍성 앞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읍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입장료는 고창 주민은 무료, 타향인은 1000원이었다.우리는 타향인이니까 당연히 1000원씩을 지불하고 들어갔다. 첫인상은 무척 깔끔하다는 것이었다.성곽도 자연산 돌들로만 쌓아 올렸다. 시멘트가 섞이지 않아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붉은 철쭉꽃들이 만개하여 읍성을 떠받치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토속적 내음새가 물씬 피어난다. 읍성의 정문인 공북루, 2층 누각이 하늘을 날아 오르듯 날렵하게 솟았다. 동편으로 오르며 뒤돌아본 북문인 공북루. 성문을 보호하고 감싸는 옹성의 곡선이 예뻐 보였다. 동편의 성안.휘어진 소나무들의 자태가 고왔다. 동북쪽의 하늘엔 구름이 몰려드는..
신탄리역 철원읍에서 도피안사를 지나 북으로 달리면,한국전쟁당시 폭격으로 앙상하게 잔해만 남은 인공시절 북한노동당청사가 도로 우측에 나타나고, 바로 위쪽에 민간인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는 민통선이 길을 가로 막는다. 민통선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다 남녘으로 방향을 돌리면 곧 신탄리에 도착한다. 이 역은 본의 아니게 분단때문에 경원선의 종착역이 되어버린 분단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밤새 내린 비 구름이 아직도 걷히지 않아 신탄리의 아침은 그리상쾌하지 않았다. 작은 역사 앞 공터에 몇 대의 승용차들이 한가롭게 서 있었다. 공터에 차를 대고 역안으로 들어 가, 역무원에게 역안 출입을 허락받았는데, 역무원의 친절함에는시골역의 여유로움이 듬북 묻어 있었다. 역사 안에는 수 많은 솟대가 서있었다. 통일을 향한 염원을 솟대로 표현..
한탄강 1. 순담계곡 밤새 무섭게 비가 내리더니,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는 그쳤다.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맑지 않았으나, 기암괴석 사이로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은 마치 장마철을 연상케 했다.레프팅의 명소로 유명한 이 한탄강 계곡은 레프팅 시설 때문에 몸살을 앓는듯 했다. 벼랑위에 세운 건축물과 구조물들이 아름다운 경관들을 헤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2. 승일교 한국전쟁 이전에 이 지역은 38이북으로 북한이었다. 북한은 한탄강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다가 북으로 쫓겨 갔다. 수복후 건설 중단되었던 이 다리를 우리 정부가 완공하여, 그 이름을 승일교라 이름지었다. 이 이름을 당시 지역 주민들은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교라 이름지었다고 믿었다.한탄강 북쪽의 주요한 교통로 역할..